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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 데레사 Jun 08. 2019

시들어 죽다 산 나뭇잎

서평은 아니고 기행문

작년 이맘때 한라산 성판악 코스를 탔고 선흘곶자왈을 들렀다. 제주도를 네댓 번 가다 보니 맛집이고 리조트고 질린 데다 아이들도 커서 시도한 자연 만끽 코스였다. 난 두 무릎이 시큰거려 다음날 내내 절뚝거렸지만 세 남자는 멀쩡히 뛰어다니는 걸 보고 세월의 야속함 보다는 할 만하겠다는 생각을 먼저 했다.

그래서 올해는 거문오름을 일찌감치 예약하고 갔다. 초반 250계단을 빼면 즐겁고 상쾌한 산책 같다. 해설사의 설명도 아주 재미있어서 정말 가길 잘했다고 느꼈다.

1. 삼나무

다공질의 돌 탓에 비가 내리는 족족 땅으로 스며버리는 환경으로 제주도는 나무나 작물이 잘 자라지 못하는 대신 구릉의 들판이 많았다고 한다. 지금처럼 울창한 숲을 가꿀 수 있었던 것은 물을 대는 기술을 활용하면서부터다. 1970년엔 같은 섬인 일본에서 잘 자라는 삼나무를 대대적으로 식재했다고 한다. 그래서 제주 어느 곳을 가더라도 열 맞춰 자라는 삼나무는 쉽게 볼 수 있다. 거문오름 초입에도 삼나무가 울창하게 자라고 있지만 이상하게 새소리가 뜸하다. 제주 토종 나무가 아니라 그렇다고 한다. 난 푸른 자연은 무조건 좋다. 하지만, 제주도에서 내내 살아온 새들은 그렇지 않았나 보다. 똑똑하다.

2. 식나무

식나무의 어린순은 붉으죽죽하고 아래로 축 처져있다. 죽은 척하는 거다. 무릇 새싹은 여리고 연초록에 보드랍기 마련이건만, 식나무 새싹은 반대다. 벌레들을 피하기 위해서란다. 잎이 두터워지고 강해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짙은 초록을 띄며 빳빳하게 펴진. 그걸 보며 식나무의 독자적이 생존 전략에 감탄했다. 인간은 직립 보행을 얻은 대신 태어나자마자 걷지도 못하고 손이 많이 가는 아기를 낳게 되었다. 해서, 아기는 사회성을 빠르게 익힘으로서 생존율을 높여야 했고 이는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의 다른 종을 압도하는 베스트 오브 베스트 스킬이 되었다.

결국은 생존이다. 삭막하고 경쟁이 치열한 생존도 있지만, 지구 행성에 다른 종과 어울려 살며 독자적인 전략을 펼치고 어울려 생존하는 역동적인 현장을 엿보았다. 내 나이 마흔. 나도 생존 전략이 필요하다. 식나무처럼 오리지널 한 전략이.

3. 덩굴식물과 나무

육지에선 덩굴식물이 나무를 휘감으면 말라죽는데 제주도 곶자왈에서는 둘이 엉켜있어도 제각각 살아남는다. 그만큼 생태계 안에 영양분이 많다는 뜻이다. 제주도 감자에 묻은 흙을 봐도 유난히 검고 곱다. 그 힘인가 보다. 내일은 감자를 삶아 먹어야겠다.

4. 일본 갱도 진지

태평양전쟁 무렵 제주도의 인구가 약 21만 명인데 그중에 7만 명은 일본에서 온 군인이란다. 그 시절 길거리 행인의 3명 중 1명이 일본인. 그것도 군인이다.  무서워서 어떻게 살았을까. 여적지 제주도를 지켜온 도민들이 위대하고 고맙게 느껴진다. 거문오름에만 일본 군인이 만든 갱도 진지도 10여 개나 된다.

5. 용암 함몰구

분화구에서 나온 용암이 흘러간 말발굽 모양의 함몰구가 깊다. 그 깊이가 너무 깊어 봄에도 눈이 녹지 않는 구간도 있을 정도다. 그 주위에는 고사리 같은 양치식물이 무성하게 자라고 바닥은 보이지 않는다. 내 존재가 얼마나 미약한지 밤하늘 우주, 드넓은 바다까지 갈 것도 없다. 그 뜨건 용암이 흘러간 자국에도 나는 참 작다. 겸손이 답이다.

6. 그 외 아름다운 자연

열심히 해설을 듣고 나오는 길에 산수국에 눈이 기쁘고 이름 모를 꽃향기에 코가 호강한다. 푸른 하늘에 갈대는 차라리 그림이다. 적당히 가쁜 숨으로 거문오름을 이루는 작은 오름들의 조화를 보자면 안온한 기분이 든다.

아이들과 같이 누릴 수 있는 자연이 있어서 감사한 날이었다.


후기.

다음날 리조트 수영장에서 실컷 놀고 난 새벽, 목이 너무 아파 밤새 끙끙 앓았다. 결국 한라산에 가기로 한 날, 내 목이 돌아가지 않아 영실코스 대신 서귀포 모 통증 의학과에서 오전 내내 죽순이가 된 우리 가족. 너무 미안했다. 여행을 마치고 동네 도수 치료사에게 갔더니 3월에 일어난 추돌사고의 여파일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단다. 놀라서 수축된 근육 때문에 경추가 뒤틀렸다는 것이다. 두 달 하고도 보름이 지난 시점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자연도 놀랍지만 인체도 참 놀랍다. 비록 한라산은 못 올라갔지만 나중에 제주도에 꼭 다시 가야할 핑계가 생겼으니 적당한 제로썸이라 생각한다. 그것보다 사람의 머리가 얼마나 자주 흔들리는지 우리의 목이 머리를 얼마나 잘 지탱하고 잡아주는지 이번 기회를 통해 깨달았다. 하다 못해 얼굴에 로션 바를 때도 뒤로 밀리는 얼굴을 목이 잡아주었다는 생경한 사실을 매우 고통스럽게 알게 되었다. 목의 감사함을 새삼 깨닫고 있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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