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은 Sep 04. 2021

미역국과 친분 쌓기

장그래의 일기 훔쳐보기

2020년 11월 25일

오전 11시 55분

 

4교시 종소리를 기다리는 네 사람의 엉덩이가 들썩인다. 대변과 차변의 균형을 맞추느라 숫자와 끙끙대는 회계팀의 시선은 이제 온통 모니터 화면 우측 하단의 시계를 향한다. 같은 시각, 비슷한 차림새를 한 명동의 일꾼들이 서서히 건물 틈에서 쏟아져 나온다. 하나의 빌딩이 참으로 많은 사람을 품었다.


개미만 한 인간들이

점 점 점 점.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모두 이 시간을 기다렸다.

살아있는 점들이 발걸음을 옮긴다.

대표도, 부장도, 대리도, 인턴도.

그저 하나의 점이 된다.


이들의 배꼽시계 만큼은 공평하다. 모두12시가 되기 30분 전부터 은밀한 소리를 낸다. 나의 오장육부에서는 이미 다섯 번 정도 알람이 울렸다.



오후 12시 01분

부서 사람들이 듬성듬성 일어선다. 부장은 약속이 있다며 떠나고, 사수는 집에서 싸온 초록색의 풀과 빨간 방울토마토를 꺼낸다. 눈치 게임 끝났다.

남겨진 스물셋의 머리 긴 장그래와 마흔 초반의 일꾼 셋.

네 명은 옹기종기 모여 14층으로 올라오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린다.

 


오후 12시 05분

“은맨 오늘 뭐 먹을래?”


나는 13에서 14로 바뀌는 빨간색 숫자를 바라보며 머리를 굴려 본다.

어제 먹은 점심, 오늘의 날씨, 오후의 미팅 여부.

떠올리는 메뉴 족족 조건 미달이다.

제육은 어제 먹었고, 막국수는 춥고, 마라탕은 너무 멀다.

아버님들과 그릭 요거트 가게에서 토핑을 고르는 일은 상상할 수 없다.


“일단 엘베 타시죠.”



오후 12시 09분

세찬 소리가 1층 로비의 회전문을 두드린다.

얼굴이 아리고 볼이 찢기는 듯한 바람이다.

바이러스의 잔여물인 양 한적한 명동 거리. 우리는 이를 외면하고 지하 세계로 내려간다. 회현 지하상가에는 S.E.S와 소녀시대, 레드벨벳과 에스파가 공존한다. 번쩍이는 아이돌 생일 전광판이 눈을 찌르고, 20세기에서 온 듯한 낡은 LP가게에는 먼지가 수북하다. 골목을 지나면 귀금속 가게와 배용준의 사진이 붙어 있는 안경점이다.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어딘가로 향하는 대리님의 꽁무니를 쫓아 종종걸음으로 따라간다. 검정색 롱 패딩 속으로 몸을 감추고 목에는 네모난 사원증을 건 사람들 사이에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한다. 인턴 수료증을 받기까지 한 달밖에 남지 않았지만, 아직도 명동 지하의 길이 낯설다. 선배 일꾼 셋의 그림자를 밟으며 쫄래쫄래 쫓아간다. 신세계 백화점으로 연결되는 통로를 지나 지상 세계의 빛이 보이는 출구로 향했다.



오후 12시 15분

익숙한 간판이 보인다.


호호미역


호호.

또 미역을 먹으러 왔군.


일주일 만에 다시 만난 사장님께 안녕을 묻고,

네 명의 일꾼들은 키오스크 앞에 나란히 줄을 섰다.

조개와 미역이 담긴 국물은 한화 12,000원.

생일에도 미역국을 찾지 않는 내가 시급보다 3,280원 비싼 미역국을 급식처럼 자주 본다.

입사와 동시에 미역국과도 친분을 쌓아야 했다.



오후 12시 18분

누구보다 빠르게 컵과 수저를 세팅한다.

휴지를 한 장씩 경쾌하게 뽑아 세 일꾼과 내 앞에 놓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착착. 거꾸로도 정렬을 잘 맞춘다.

하루 중 자신감이 가장 흘러넘치는 시간이다.



오후 12시 24분

나의 숟가락과 국물이 맞닿아 적당한 온기가 형성되었을 즈음, 선배 일꾼들의 뚝배기는 어느새 비스듬히 세워져 무표정의 얼굴을 하고 있다. 이들은 매번 무언가에 쫓기듯 비장하게 숟가락을 손에 쥐고 점심을 마신다. 식도를 타고 들어가는 미끌미끌한 미역을 느낄 틈도 없이 호로록 식사가 끝이 났다.   


학교를 떠나 도착한 첫 밥벌이 장소.

나는 이곳에서 내 시급보다 비싸기만 하고,

색깔만 다른 국물들을 떠먹다가 퇴사했다.


전에는 없던 알러지가 생겼다.

이름하여 국밥 알러지.

김이 모락모락 나고 뚝배기가 쌓여 있는 식당 앞에서는 흐린 눈을 하며 지나친다. 명동 거리를 지날 때에도 큼직한 회사 건물에 모자이크를 칠한다.


미역국도, 회사도.

물린다.


은은

머리 긴 장그래로 이 회사와 저 회사에 다니다가,

다시 학교 도서관 언덕을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졸업반인데 뭐 해 먹고 살 거냐고요?

요리엔 재능이 없어 사 먹고 다니려고요.

그래도 명동에서 먹는 미역국보다는 학식이 입에 맞더라고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