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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성지 Jun 20. 2021

살아가며 진정으로 남기고 싶은 것

인지도라는 것의 허망함

아침이면 어김없이 울리는 알람소리.

'일어나야지, 일어나야지' 머리가 몸을 깨운다.

간단히 샤워를 하고 옷을 주섬주섬 챙겨입고 가방을 챙겨 차에 오른다. 


국회의원들이 회관에서 아침을 시작하는 시간은 7시 30분이 일반적이다. 

정부 관계자들과 회의를 하려면 정부 청사가 움직이기 전이어야 해서이다. 

의원들끼리의 모임도 대부분은 그 시간대에 있는 조찬 모임이다.

"정말 조찬 모임이 없었으면 좋겠어, 이 조찬 문화는 우리나라만 있는 것 같아" 한 선배 의원님의 투덜거림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국회의원이 되고 가장 힘든 것 중 하나가 바로 조찬모임이다.

그렇게 시작된 아침은 정신 없이 이어진다. 

당무집행회의, 비공개 최고위원회, 최고위원회, 간간히 상의할 일들이 있을 때 모여서 하는 회의, 중간 중간 기자들의 전화와 상황에 따른 오전 대변인 브리핑까지 하고 나면 11시 30분. 

그때서야 비로소 회관에 올라가 잠시 자료를 정돈하고 점심 식사를 하러 간다. 


어느날 식사 중 오래전부터 알고지내던 국회 출입기자가 "선배, 국회의원 되니 좋아요?" 하고 물었다.

정말 어려운 질문이다. 되고 싶냐는 질문에는 여러이유와 설명을 덧붙여가며 '그렇다'고 대답했는데, 막상 되고나니 좋냐는 질문에는 대답이 쉽게 나오지를 않는다. 

"국회의원은 본인이 희생해서 주변 사람들이 좋은거야. 보좌관들 중에 의원되려는 친구들 보면 말리고 싶어" 대답을 머뭇거리는 순간 다선의 한 선배 의원께서 웃으며 대신 말씀해주신다. 역시 고개가 끄덕여진다.


잠자는 시간과 자유시간 그리고 주말을 모두 포기하고 일해도 칭찬 받기 보다 욕을 먹는 직업. 

그런데 나는 왜 정치를 하려고 했을까.


"형님은 이제 죽어도 묘석에 '학생부군'이라고 안적히니 좋겠어요" 오랜만에 저녁을 함께하던 아나운서시절 후배가 웃으며 이야기한다. "죽어서 묘석에 뭐라고 쓰이는지가 중요하냐?" 내 대답에 한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형님도 참~ 당연히 중요하지요. 사람이 죽어서 남기는 것이 이름 하나인데요"라고 대답을 한다.


나도 언제부터인가 만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네이버나 다음과 같은 포털을 검색한다. 프로필, 관련 기사, 특히 인터뷰가 있으면 더욱 참고가 되곤한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만나는 모든이들은 이름 앞에 그들을 수식하는 무엇인가가 붙어있는 사람들이 되어있었다. 장관출신, 대변인출신, 청와대출신, 앵커출신, 최초의 여성과학자 등. 


내 이름은 한준호다. 나라한, 준걸준(준수할 준), 빛날호


'한준호'라는 이름 석자는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셨다.

당시 한달 먼저 태어난 사촌형과 내 이름을 지으며 할아버지께서는 '정호(바를정, 빛날호)'와 '준호(준걸준, 빛날호)'라는 이름을 함께 살던 어머니께 먼저 보이시며 고르라고 하셨단다. 어머니께서는 당시 즐겨보시던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 극중 이름인 '준호'가 마음에 들어 내 이름은 '한준호'가 되었다. 그 때 어머니께서 내이름을 '정호'로 골랐더라면 인생이 달라졌을까?


"한준호 의원, 오랜만이지? 다름이 아니라 어젯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기에 연락드려요"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중앙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는 이제 머리도 희끗해진 전 직장의 최형석 선배가 빈소에서 웃으며 나온다. "15년 만이지?"


2000년, 첫 직장이었던 통신회사의 민영화가 진행 중일 때 아내의 임신 사실을 알게되었고,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나'하는 불안감에 남몰래 준비했던 시험에 합격하며, 현재의 한국거래소의 전신 중 하나인 코스닥증권시장으로 이직하게되었다. 그리고 2003년 초,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되었다.

"준호야, 너 이회사에 있지말고 언론사 시험을 보는 게 어때?"

통계와 데이터를 다루는 업무를 하다 홍보실로 부서를 옮겼을 때였다. 같은 부서에서 일하게 된 최형석 선배가 저녁에 도착한 신문 가판을 함께 스크랩하던 중 언론사로 이직을 권유하는 게 아닌가.

옮긴 부서에서 이제 막 대리로 진급도 했고, 열심히 일하던 시기라 이직은 단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튼튼한 직장도 드물었기도 했다. "언론사요?" 


선배의 이야기는 제법 설득력이 있었다. 이 회사는 튼튼하긴 해도 미래가 없고, 진급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사장의 대부분은 정부에서 내려오니 우리가 올라갈 수 있는 자리에는 한계가 있었던 건 사실이었다. "준호야 생각해봐, 이제 막 낳은 네 딸이 나중에 아빠 뭐해요? 라고 물었을 때, '우리아빠는 한준호기자예요. 한준호 아나운서예요'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게 좋지 않니? 어디다니고, 뭐하고 설명하는 것보다. 아직 20대니까 잘 생각해봐" 이야기를 듣다보니 딸가진 아빠입장에서 충분히 설득력있게 들렸다. 그당시 몇몇 방송에 출연하며 시황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옆에서 보던 선배 입장에서는 가능성이 보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설득에 넘어갈 만큼 나는 충분히 어리고 무모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무모함이야말로 도전을 하는데 가장 필요한 요소가 아니었던가 싶기도 하다.


MBC를 다니며, 나 자신의 이름앞에 수식어를 함부로 붙이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이름 앞의 수식어는 나의 몫이 아니었다.


내 방송인생은 비록 짧았지만, 그나마 방송인으로서 잠시 시청자들에게 인상을 주었던 시기를 가졌던 계기가 있었다. 방송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 준 사람, 요즘 MC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김성주'선배와의 만남이었다.  많은 활동도 같이 했지만, 무엇보다 방송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서 배운바가 컸다.

그리고 지금도 그 날을 잊지못한다.


"준호야, 이리와봐" 기수별로 자리를 배정받는 아나운서국 특성상 나와 등을 맞대고 앉아있던 선배는 내가 방금 하고 들어온 뉴스를 모니터 해주기 시작했다. "빨리 유명해지고 싶지? 사실 나도 그랬는데, 시청자들에게 이름을 알리기가 너무 어려워, 그런데 잠시 방송을 멈추잖아. 그 노력과 상관없이 금방 잊혀진다. 그게 우리같은 방송인들의 삶이야" 당시에는 선배의 그 말이 와닿지가 않았다. 그는 이미 '화제집중'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고, 나는 이제 막 신입으로 들어와 얼굴알리기에 급급할 시기였다.


2005년, 1년간의 휴식기를 갖고 다시 화면에 얼굴을 보이게 된 것은 토요일 정오뉴스였다. 종편이 없었기에 지상파 3사 아나운서들은 평균 10%대의 시청률에서 방송하던 아나운서들의 황금기였다. 그렇다보니 3~5% 사이의 뉴스는 당시에는 관심받는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승부를 봐야했던 나로서는 많은 모험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시기 내가 연구하고 있던 롤모델은 일본 아사이TV의 '뉴스스테이션'의 메인 앵커 구메히로시였다. 문어체가 아닌 구어체로 뉴스를 하기 시작하며, 판넬과 여러 도구를 이용해 시청자들에게 이해를 시키는 뉴스를 하던 구메히로시는 일본 뉴스에 버라이어티라는 장르를 연 장본인이기도 하다. 나역시 그를 모니터하며 뉴스를 버라이어티 관점에서 접근하기 시작했었다. 머리도 조금 더 길러보고, 넥타이와 정장도 지금으로서도 너무 파격적인 옷들을 입고 뉴스를 진행했다. 스피치도 남들에 비해 빨랐고, 앵커멘트도 가급적 구어체로 바꾸었다. 그에 대한 반응은 극과 극으로 다가왔다. 보도국으로부터 '뭐하는 짓이냐'는 핀잔부터 시청자들에게는 '신선하다'는 응원까지 반응이 다양했다. 결정적이었던 것은 소폭 오른 시청률 덕에 자신감이 생겨 턱시도에 가까운 옷을 입고 뉴스를 하던 날이었다. 실은 옷을 입으며 나역시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곤 일이 터졌다. 보도국에서 아나운서국으로 강력하게 항의를 한 것이다. 저렇게 뉴스할거면 앵커를 교체하라는 것이었다. 나를 응원하던 부장님께서도 조용히 불러서 '충분히 실험해봤으니, 이제 보도국에서 원하는 모습으로 돌아가 실력으로 보여달라'는 주문이었다. 사실 고집을 부리고 싶었다. 그때 다시 김성주 선배가 조언을 해왔다. "준호야, 개성이 생기는 건 좋은데, 네가 보여야지, 넌 지금 옷만 보여"

생각이 깊어졌다. '그래 기본으로 돌아가자 충분히 해봤다'


"한준호씨?" 어느날 뉴스를 하고 올라와 메이크업을 지우고 나오는데 보도국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준호씨, 일본에서 준호씨를 만나고 싶다고 지금 정문 앞에 팬들이 와있어요." 뜻밖의 전화였다. 나는 예능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도 아니었고, 당시만해도 그렇게 유명한 아나운서도 아니었다. 그런데 일본에서 뉴스를 보고 나를 만나겠다며 네 분의 일본 여성들이 와있다는 것이었다. 나를 꾸미지 않고 기본으로 돌아갔던 그 시기, 짧은 방송생활에서 그나마 꽃을 피웠던 시기가 되었다. 인터넷 검색어에 자주 이름이 등장하고, 팬들이 방송사 앞으로 찾아오는 일들이 생기고, 팬클럽이 만들어졌다.  그 이후 '쇼바이벌', '닥터스' 등 굵직한 프로그램에 캐스팅되기 시작했다.


이름이 알려진다는 것, 내가 진정 원했던 것이고 설레는 일임에는 분명했다. 하지만, 파업으로 방송을 놓으며 보낸 긴 세월을 보내는 동안 '유명세'라는 것이 마치 마약과 같아서 이름이 잊혀져갈 때 오는 우울증이 무척 컸다. 금단현상과 같이 오는 이 후휴증을 깨닫고 극복하기 위해서 나자신과 타협해가는 긴싸움을 지속해야 했다. '유명한'이라는 내가 얻었다고 생각한 가치마저 내 스스로 지니고 살 수 없는 형용사였다. 나는 이름 앞에 붙는 형용사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되었다.


"오늘 나온 게스트를 소개합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대한민국 국회의원 중 가장 인물이 좋은 의원이 아니신가합니다. 이 분 특이한 이력이 있어요. 아나운서 출신입니다. 그렇게 유명하진 않았지만,  하하~"


유명 팟케스트에 초대를 받아 나갔다. 진행자의 소개에 잠시 '뜨끔'과 '울컥'이 함께 밀려들었다.

"저는 좀 생각이 다릅니다. 그래도 한때 이름 좀 날렸던 한준호입니다" 그의 소개에 긍정해버리면 왠지 나의 지난 노력들이 다 달아날 것 같았고, 나 스스로를 띄우기에는 가진 것이 없었다.


"의원님, oo방송에서 의원님 수요일 고정패널로 모시고 싶다는데요. 어떻게 회신을 할까요?"

국회의원이 되고 1년차 때였다. 아나운서 출신이라서인지 패널 요청이 제법 들어왔다. "내가 가서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나, 지금은 상임위일과 지역구 일에만 매진합시다. 내가 나가도 당이나 원내상황도 잘 모르고 괜히 실수하면 당에도 피해를 줄 수 있어요"

이게 내 진심이었다. 의원이 되었다고해서 국회가 돌아가는 모든 상황을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제 당선되어서 상임위원회 돌아가는 내용이나 법안도 제대로 파악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패널로 나가 모르는 내용을 떠들다 실수라도 하면 온전히 당에 피해를 주는 것이라, 그런 실수가 하고 싶지 않았다. 또한 뽑아 놓았더니 얼굴 알리는데만 힘쓴다는 소리를 지역구에서 듣고 싶지도 않았다.

"의원님, 그래도 인지도를 좀 쌓으셔야 도움이 되시지 않겠습니까?" 보좌진들은 이런 기회가 누구에게나 오는 것이 아니어서인니 조바심이 나보였다.

"임비서관, 나도 한 때 방송을 해보았는데, 그 인기라는 것이 한때이지 영원하진 않아요. 내가 대변인이 되어서 당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게되는 시점이 오면 그때는 시키지 않아도 열심히 할테니 때를 기다립시다."


나는 개인적으로 노자의 사상을 좋아한다. 그의 '무위'사상은 시청률 20~30%대 방송을 해보며 쉽게 얻었던 인지도로 인해 다시 그런 인지도를 만들려고 애쓰면서 생겼던 여러 실수들과 그로 인해 얻게된 때를 기다리는 참을성이 생기며 공감하게된 사상이다. '무위'는 인위적이다 할 때의 '인위'와 같은 말인 '유위'의 반대개념으로 애쓰지 않음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저변에는 충분한 노력을 깔고있다. 다만, 그 결과를 너무 인위적으로 만들려고 애쓰지 않음을 뜻한다.


아이에게 '저희 아빠는 한준호예요'라는 자부심을 주고 싶어 시작했던 나의 행보는 어느덧 정치인의 길을 걷기에 이르렀으나, 그 17년의 세월동안 내가 얻은 것은 '인지도'란 허망한 것이며, 그것을 위해 '인위적'일 필요도 없었다는 것이다. '매순간 자신의 이름과 싸우는 것'과 언젠가 받게될 '내 이름 앞의 형용사가 무엇이 될지'를 신경쓰는 것이 조금 더 자신을 단단하게 만드는 일이라는 것을 나이 50을 앞두고 깨닫는다. 


나는 언젠가는 국회의원이었다는 사실도 잊혀질지모른다. 하지만, '한준호'의 가치는 놓치고 싶지 않으며, 국회의원이었다는 것에서 오는 '유명세'에 빠져 결국 끊지 못하는 금단현상을 겪지 않으려할 것이다. 그것이 내게 주어진 '이름을 팔며 살아야 하는 삶'을 사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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