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현정 Jan 05. 2020

이혼할 수 있지. 그런데 초록이는.

윤이형 작가의 <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

 한 집에 살았던 두 마리 고양이가 수년의 간격으로 죽는다. 사람보다 수명이 훨씬 짧기 때문에 반려묘를 키우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겪는 큰 슬픔의 순간이다. 고양이의 순차적 죽음과 함께 희은과 정민의 이야기가 연결되어 작품이 전개된다. 


 소설 속에서 희은과 정민이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여성으로서 남성에 비해 더 크게 와 닿을 수밖에 없는 범죄와 폭력으로 인한 불안의 민감성 때문일까. 그렇다면 가족의 헤어지게 된 원인 제공자가 희은이 되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이유로 단정하고 그녀를 책망하고 싶지 않다. 남녀 성별에 다른 사회적인 소외를 주제로 접근하기보다 개인의 문제로 보고자 한다. 남편인 정민이 수입이 없고 희은이 외벌이를 하며 가장의 역할을 한다고 해서 가족의 단단한 결속력을 깰 수 있는 이유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이명 고시의 낙방으로 희은에 대한 미안함과 추락하는 자존감이 극한에 이른 정민은 어떤 내밀한 곳에다 아내를 죽이고 자살하고 싶다는 메모를 쓰게 된다. 누구나 사는 동안 자살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다. 또한 누구라도 오랜 기간 극한의 상황에 내몰리게 되면 죽음을 통해 가족을 구제하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 도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스쳐간 생각을 무엇이든 쓸 수 있는 나만의 일기장에 기록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 그만큼 정민은 처절했고 외로웠을 것이다. 이에 반에 희은에게 이 메모는 둘의 관계의 치명적인 사건이 된다. 희은은 인근에서 폭행 사건을 목도했던 트라우마가 있었고 이를 적절하게 치유하지 못했기에 희은의 입장 또한 충분히 납득이 간다. 결국 가족의 해체라는 피해에 피의자는 없고 희은과 정민, 그리고 그들의 아이인 초록은 피해자로 남는다. 남자와 역할이 바뀌더라도 똑같이 가능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에 남녀의 문제가 아닌 개인의 사건을 볼 수 있다. 물론 가족의 해체를 피해라고 보기에 희은과 정민에게는 과장일 수 있으나 초록에게는 극명하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빠와 고양이 순무와 살 수 있는 권리를 빼앗겼다. 


 작품은 두 마리의 고양이의 순차적 죽음을 통해 이를 연결시켜 과거의 이야기를 전개한다. 각각의 고양이는 희은과 정민의 캐릭터와 매치되는데 순무는 정민을, 치커리는 희은과 비슷한 성격이고 그래서인지 각각을 따른다. 고양이 둘은 친해지지 못하고 각자의 주인에게만 친근하게 군다. 결국 고양이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성격에 따라 함께 있지만 반드시 어울려 섞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 가족이라는 제도는 한 울타리 속에 구성원을 집어넣게 되어 있지만 어떤 이유가 되었든 함께 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언제든지 합의를 통해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제도의 울타리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희은의 이혼 결정, 그리고 정민이 후에 희은의 폭력에 대한 민감성에 대해 점차 이해하게 되면서 그녀의 결정을 납득하게 되는 과정은 순리적으로 보인다. 다만 초록이 겪은 상실감, 만약 이것이 트라우마로 남게 된다면 그녀의 상처는 어떻게 보듬어야 할지. 초록이 성인이 되어 사랑을 하게 될 때 이 상처가 상대에게 또 다른 상처와 고난을 주게 되지는 않을지. 

초록에 대한 후속조치가 궁금증으로 남는다.  



작가의 이전글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