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땅콩 Jul 03. 2020

서비스를 종료합니다

나는 어쩌다 프로 이직러가 되었나


“그래서 우리 애플리케이션을 스토어에서 내린다는 거죠?”


개발자가 물었다. 그 회의의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다.




어느 월요일 오전, 슬렉(slack)에 갑작스러운 미팅 공지사항이 떴다. 00 사업부는 오후 1시 반에 중요한 회의가 있으니 모두 회의에 참석해달라는 것이었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부사장님이 지난 미팅에서 넌지시 우리 사업을 계속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고 말했던 것이 기억났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우리 서비스는 수익성이 없으며, 더 이상 서비스 업데이트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대표님이 말했다. 무거운 이야기들이 오갔고 때마침 회의실 통유리창 너머로 세찬 폭풍우가 쏟아졌다. 나는 우산 없이 비를 맞는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인원은 어떻게 유지될 수 있을까? 회의가 끝나고 빠르게 개별 면담이 이루어졌고, 결국 많은 이들이 권고사직 되었다. 남은 인원에게는 새로운 사업에서 각자의 몫을 찾아서 일하라는 미션이 주어졌다. 하지만 R&R이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또 함께했던 많은 동료가 거의 매일 짐을 싸고 회사를 떠나는 모습을 보며, 매끄럽지 않았던 퇴사 통보 방식에 실망한 이들 역시 회사를 떠났다.


나는 그즈음 매일 밤 나의 쓸모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 직장생활들을 곱씹어보았다. 인턴을 제외하고 지금 직장은 네 번째 회사였다. 첫 직장에서는 계약직이었기 때문에 이직을 결심했었다. 첫 직장의 정규직 공채 최종 면접에서 떨어진 후, 지점에서 계약직을 뽑는 채용 공고를 보고 재지원했었다. 그런 이력 때문인지 내가 연차를 쓰는 날마다 팀장님은 "너 면접 보러 가는 거지?"라고 농담을 하곤 했다. (물론 면접을 보기 위해 휴가를 쓴 적도 있었다)  퇴사 통보를 하던 날 "너 그럴 줄 알았다."라는 상사의 말에 속이 후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약간의 섭섭함이 남았었다. 하지만 그 회사는 계약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해줄 리가 만무했고, 옳은 결정이었다. 계약직이라는 시한부 직장인으로 일하며 늘 조바심이 났었고, 퇴근 후에는 자주 채용 사이트를 들여다보곤 했다.


두 번째 직장은 1년 넘게 다녔다. 정규직의 안정감은 느꼈지만, 이전 회사와는 조직 문화가 상당히 달랐다. 업무 시간에 개인 휴대폰 소지를 금지하는 것은 물론 업무 메신저로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것조차도 때로는 길길이 화를 냈다. 더군다나 계열사에 인사 공백이 생기면서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전적 발령이 나는 바람에 세 번째 직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또다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업무를 맡았고, '전문 역량'이란 키워드는 늘 아킬레스건과 같았다. 점점 넓어지는 업무 범위와 많은 업무량에 시달리다 개인 면담을 요청했었고, 애자일식 경영 방식이라는 답변에 진이 빠졌다. 그래도 한 금융사에서 3년 가까이 일했고 주니어 레벨이 많은 업무를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그리고 네 번째. IT 업에서 자체 앱 서비스를 해보고 싶어서 자리 잡은 곳이 지금의 직장이었다. 이제는 진득이 전문 역량을 기르고 싶다는 바람이 무척이나 컸다. 그런 내게 회사에 입사한 지 고작 1년이 지나서 듣게 된 사업부 해체 통보는 큰 충격이었다. 유저들이 사용하지 않는 서비스, 수익성이 없는 서비스를 운영한다는 것이 이렇게 가슴 아픈 일인 줄은 몰랐다. 더욱이 이제 누군가가 나를 평가한다면 아마 진득이 일할 성미가 없는 사람으로 판단할 것 같았다. 하지만 변명해서 무엇하랴, 나의 커리어 패스는 여러 회사를 거쳤음을 부정할 수 없다.




답답한 마음에 회사 근처 도산공원을 몇 바퀴를 돌았는지 모르겠다.


폭풍과도 같았던 월요일 미팅 이후, 직장을 다니며 퇴근 후에는 이력서를 업데이트하기 시작했다. 일이 바쁠 땐 버겁게 느껴지던 업무도 경력 사항에 고작해야 몇 줄로 남았다. 운영하던 서비스가 언젠가는 세상에서 없어질 것이란 허망함과 지난 시간에 대해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수행했던 업무들이 초라하게 느껴졌고, 채용공고 속 화려한 필요 역량에 기가 죽었다. 결과적으로 헤드헌터 몇 명과 두 곳의 회사에서 면접 제의를 받았다. 운 좋게도 이른 시일 내에 내게 과분할 만큼 좋은 다섯 번째 직장을 구했다.


이직할 곳이 정해지고 나서 지난 직장에서 함께 일했던 과장님께 오랜만에 연락을 드렸다. 수년 전 우리는 같은 서비스를 기획했었다. 오랜만에 가진 식사 자리에서 과장님이 퇴사하고 나서 애플리케이션을 배포하기까지 겪었던 우여곡절을 얘기했다. 난생처음 해 보는 일이었고 막바지에 그 업무를 담당하던 사람은 결국 나 혼자였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런 식으로 애플리케이션을 만든 것이 신기하다. 삐걱거리는 진행 과정과 무관하게 업무를 완수할 수 있었던 것은 강력한 Top-down 방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시 이직을 결심하게 된 연유와 새로 옮길 직장, 그간의 일들에 대해 푸념했다.


"근데 서비스가 망한 건 처음이에요."

"야, 생각보다 그런 사람들 많아. 회사는 망해도 넌 안 망하면 돼."


직장생활의 연륜이란 이런 걸까. 과장님의 한 마디에 의기소침해졌던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회사가 경영난으로 문을 닫거나, 진행했던 프로젝트가 실패로 끝나 다시 직장을 구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실제로 면접에서도 그런 사람들을 많이 만나보았다고 하셨다. 중요한 것은 그 경험을 통해 무엇을 얻었는지, 그 과정에서 본인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했는지가 중요하다는 말을 해주셨다. 


여러 회사를 거치며 겪었던 실패와 시도가 생각났다. 신입시절에는 말도 안 되는 실수도 자주 저질렀다. 너그러이 신입을 대해주는 곳도 있었지만, 엄격한 규율을 가진 곳에서는 융단폭격 같은 꾸지람을 들어야 하기도 했다. 두 번째 직장을 함께 다녔던 입사 동기는 실수하면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고 했었다. 회사의 군기가 강할수록 돌아오는 질책이 무서웠기에 업무 실수에 대한 두려움은 컸던 것 같다. 


단순 업무 실수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는 연차가 되고 나면 안일함이 쉬이 몰려온다. 늘 하던 일이라서, 하던 방식대로 하기에 오히려 잔 실수를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내 경우엔 그럴 안일함을 느낄 새도 없이 또다시 다른 부서와 업무에 배정되는 바람에 전문성을 기르지 못해 속앓이했다. 하지만 늘 돌파구는 있었다. 때로는 외부 강의를 통해 전문성에 대한 갈증을 해결하기도 했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업무 지식의 빈틈을 메워나갔다.


새로운 직장으로 출근하기 전, 사흘여를 앞두고 있다. 다섯 번째 직장에서도 언젠가는 실패의 순간이 오리란 걸 안다. 작은 실수일 수도 있겠고, 지금은 알지 못하는 역경의 순간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조금은 담대해진 마음으로, 하지만 성실하게 업무에 임하고 싶다. 그리고 이번에는 더 많은 이들이 사용할 서비스를 만들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작가의 이전글 저 사주 보러 왔는데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