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alli Jan 13. 2024

캐리어와의 사투

#치앙마이입니다

나는 지금 치앙마이에 있다. 태국에 온 지 오늘이 벌써 5일째다. 작년에 친구가 치앙마이에서 한 달 살이 한 걸 보고 지난여름 무작정 표를  끊었다. 한 달까지는 아니고 24박 정도? 이번 여행의 목표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었으니 오기 전에 알아본 것이라곤 숙소 밖에 없다. 뭐 길바닥에서 잘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고 완벽하게 무계획으로 떠나서 숙소를 이리저리 잡을 만한 용기도 없다. 영어도 제대로 못하는데 뭘 그렇게 매번 외국으로 여행을 가려고 하는 건지, 나도 내가 잘 이해되지 않지만.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 표정이 제일 좋다는 친구들 이야기를 들으면 어디 가는 게 좋긴 좋은가보다.


85년생인 나는 코리아 에이지로 계산하면 마흔 살이 된다. 윤석열 대통령님 덕분에 생일이 안 지나서 지금 38세이긴 한데 그래서 마흔 인 듯, 마흔 아닌 것 같은 애매한 기간을 지나는 중이다. 그래서 점점 사람들이 나이를 물어보면 태어난 년도를 얘기하는 것 같기도. 여하튼 이 얘기를 왜 하냐면 원래 나는 마흔이 되면 남미 여행을 가려고 했었다. 혼자 가긴 무서우니까 여행사로 가면 35일에 천만 원 정도 예산을 잡아서. 그런데 막상 마흔이 되니 체력도 걱정이고, 코로나 이후 여행 상황이 영 시원찮기도 하고, 가장 중요한 돈 천만 원을 막 써댈 용기도 없다. 진짜 40살이 되는 해에 남미를 가든, 유럽 일주를 하든 다시 생각해 봐야지.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넘어가자니 아쉽고, 혼자 여행을 가야 하는데 처음부터 유럽을 도전하자니 무섭고, 그래서 결국 요즘 그렇게 유행한다는 치앙마이 한 달 살기를 시도하게 된 것이다.(다시 말하지만 한 달은 안되고 24박 정도?)


사실 터키를 시작으로, 캄보디아, 베트남, 모로코, 대만, 크로아티아, 쿠바, 스페인, 스리랑카, 일본(본토, 오키나와) 이 정도를 다니긴 했는데 20일을 넘긴 적은 없다. 그래서 처음에는 집에 있는 24인치 캐리어(작년 1월에 일본 1주일 여행 갈 때 썼던)를 가져가려고 했다. 그런데 24박이면 아무래도 이것저것 챙길 게 더 많아질 텐데 괜찮은가 싶어 쿠팡에서 급히 토요일에 주문해서 일요일에 도착하는 28인치 캐리어를 샀다. 집 앞에 떡하니 서 있는 캐리어를 보니 아니 이거 너무 큰데, 내 키가 158인데 캐리어가 75센티니까 손잡이까지 뽑으면 거의 내 키를 맞먹으니 이게 맞는 건가 싶은데, 정말 여행 와서 맨날 친구들에게 하는 말이 “이 캐리어 여기 버리고 갈 거야.”가 된 걸 보니 잘못되긴 했나 보다.


이미 한 달씩 자주 살아본 친구는 “야, 그게 뭐가 커. 그 정도는 돼야지.”라고 하길래 뭘 그렇게 넣나 했는데 막상 짐을 넣어보니 캐리어가 다 차는 게 아닌가... 코로나 이전에 길게 여행 갔던 게 스리랑카였고, 그때는 배낭을 메고 갔다. 그러니 24일 정도 여행을 갈 때 짐을 얼마나 싸야 하는지 감이 안 왔는데, 확실한 건 예전에는 안 가져갔던 물건을 챙겼다는 사실. 그 목록을 살펴보자면 ‘마스크팩, 고데기, 토너패드, 바디로션, 화장품 브러시, 전동 칫솔, 샤워기 필터, 치간 칫솔에 발 뒤꿈치에 바르는 우레아 크림‘까지 챙겼으니 정말 생필품 대신 사치품에 해당하는 게 잔뜩 들어있었다. 굳이 핑계를 대보자면 이제 마흔에 접어드는데 피부가 뒤집어질 것도 걱정이고, 바디로션 안 바르면 늙는다 그러고, 전동 칫솔 안 쓰면 양치한 게 개운하지가 않고, 여기는 물이 안 좋아서 샤워기 필터는 꼭 있어야 된다 그랬고, 단발로 머리를 자르고 나니 고데기가 꼭 필요한 순간이 있고, 맨날 맨발로 다니는데 발 뒤꿈치 다 갈라질 것도 걱정이고, 등등 이유는 너무 많다. 게다가 더운 나라는 맨날 반팔만 챙겼는데 여긴 또 아침저녁에는 서늘하다고 해서 겉에 외투와 긴바지까지 넣었더니 옷 보따리도 하나가 더 늘어났다.


뭐, 돌아올 거 생각해서 큰 캐리어 가져간다고 하지만 나는 돌아올 때 무언가를 넣을 자리도 없다. 내가 바라는 건 필터와 온갖 화장품, 마스크팩을 다 써서 그 공간을 남기는 것뿐. 우리나라 물건이 더 좋은데 굳이 태국에서 뭘 또 사겠는가. 근데 웃긴 건 저렇게 챙겨놓고도 막상 무언가를 또 빼먹고 온 것이다. 호텔에서 신을 슬리퍼, 화장할 때 쓸 작은 거울, 몸에 바르는 선크림을 안 가져와서 태국 들어와 여기저기 다니면서 샀는데 아직도 거울은 파는 곳이 없어 화장할 때마다 아주 힘들어 죽겠다. 그 와중에 립제품을 왜 그렇게 많이 가져왔으며, 쉐딩에 볼터치에 컨투어링 한다고 온갖 화장품 다 가지고 왔다. 예전에는 최소한의 화장품을 가져오는 게 국룰이었는데, 이제는 화장 안 하면 밖에 나가지도 못하는(?) 사람이 되어서 그런 건가. 근데 여기 와보니 세븐일레븐에 온갖 화장품 다 판다. 정말 치앙마이 온다는 사람 있으면 색조화장품을 팩트만 가져오면 될 거 같다고 말할 정도, 여행자가 많아서 그런건지, 태국 사람들도 화장에 진심이라서 그런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와도 걱정 없을 듯.


그렇게 캐리어를 꽉 채우고 공항에 가서 무게를 쟀더니 두둥!! 23kg이 나와버렸네, 수화물 오버되는 거 그냥 계산하려고 했더니 1kg에 16,000원이라고 총 96,000원 추가 요금을 내야 한다네. 아니 비행기표가 65만 원인데 이게 무슨 일이야. 승무원 언니가 짐을 빼라고 해서 구석에 가서 6kg 물건을 빼내 다른 보조가방에 넣고 캐리어를 보냈다. 아, 저 쓸데없는 사치품이 6킬로는 됐나 보다. 비행 기다리는 동안 그 6kg 짐 보따리를 애물단지처럼 들고 다니면서 이게 쓸데없는 인생의 무게라는 사실을 다시 느꼈다. 여기와서도 고작 8분 거리 걸어가는데 캐리어 끌고 가는 게 거의 30분을 걸어 다니는 느낌이다. 혼자 온 첫 해외여행이라 3일 만에 돌아갈 비행기표를 검색할까 봐 걱정했는데, 그보다 캐리어 버리고 작은 걸로 다시 살까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심플하게 산다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이구나. 24인치 캐리어가 좀 작게 느껴지긴 하니 한국에 돌아가면 24인치도 28인치도 당근으로 팔아버리고 26인치 캐리어를 하나 사던지, 그냥 스리랑카 갈 때 썼던 배낭 메고 다니던지 해야겠다. 동남아는 캐리어보단 배낭이 더 잘 맞는 듯.


치앙마이 한 달 일정은 한 군데서 오래 사는 걸로 대부분 계획하고 오는데 또 여기저기 살고 싶어서 숙소를 거의 2박 3일마다 옮겨대고 있으니 내 몸뚱이만 한 캐리어 들고 다니는 게 여간 쉬운 게 아니다. 숙소를 바꾸려고 해도 이제 와서 취소가 안 되는 곳도 많고, 대체 내가 왜 그랬을까, 너무 바쁠 때 숙소를 예약해서 판단력이 떨어진 건가 후회하고 있지만 어쩔 수 없지 뭐, 많이 가지려고 하면 그만큼 내 발걸음도 무거워지는 법이라는 사실을 아주 몸소 체험하는 여행이 되어버렸다. 다음에는 가방에 들어가는 만큼만 가져와야지. 무언가를 챙기는 것보다 버리는 법을 배워야지.


매거진의 이전글 혼행의 슬픔과 기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