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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모단 Feb 10. 2021

저울의 양쪽에 놓인 돈과 생명

<후쿠시마 50> 2020


2011년 일본의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방파제를 5미터나 세웠음에도 자연의 힘은 인간의 예측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대지진의 쓰나미가 무려 15미터 높이의 파도로 원전을 덮치자 이내 모든 전기가 끊긴다. 냉각이 안 되는 노심은 펄펄 끓어올라 방호벽이 녹아내리고 핵연료가 누출됐으며 마침내 수소 폭발로 이어져 인류 역사상 2번째로 큰 원전사고라는 대참극이 벌어진다.


이 사태를 지켜본 세계 각국은 원자력발전이라는 양날의 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고 친환경 재생에너지 위주로 정책 방향을 틀거나 탈원전을 앞당기는 등 다양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우리나라 또한 후쿠시마 사고를 반면교사 삼아 시설과 설비의 안전기준이나 관리감독이 한층 엄격해지는 계기가 됐다.


지진이나 화재, 폭발, 정전 같은 비상 상황에선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해 원전을 식히는 작업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깨달은 한국수력원자력은 132억의 예산을 들여 이동식 발전차량 4대를 구입한다. 한 대에 30억 원이 넘는 ‘발전소 트럭’ 이다. 원자로 1기당 트럭 1대를 배치,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즉시 출동해 일주일간 원전에 전력을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망가진 시설을 수리, 복구할 때까지 견뎌주거나 그것조차 힘든 최악의 상황엔 시민들이 대피할 시간이라도 벌어줘야 하는 최후의 보루이자 생명줄인 것이다.



그런데 이 발전 트럭이 테스트 과정에서 일주일 연속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하기는커녕 중간중간 전기가 끊기는 사고가 계속됐고 트럭과 짝을 이뤄 가동되는 변압기마저도 빈번한 고장에 문제 투성이라는 제보가 들어왔다. 원자력발전소로 향하는 차 안에서 M선생님은 열변을 토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만에 하나 사고라도 나면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진다!” 공익신고자인 그는 국내 굴지 중공업 회사의 변압기 설계자였다. 로비와 접대, 향응과 뇌물, 실험보고서 조작을 거쳐 누더기 상태로 납품되는 바람에 전기공급량과 안전성이 현저하게 떨어진 불량품이 원전 안에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원자력발전소는 ‘통합방위법상 가급 국가중요시설’ 이라 취재는 고사하고 출입조차 쉽지 않다. 결국 산업통상자원위원회 소속 국회의원까지 대동해 ‘산업시찰 의정활동’이라는 명목을 빌려 가까스로 시설 안에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이제 M선생님과 함께 변압기를 확인해야 할 차례. 변압기는 거대하고 육중한 캐비닛 안에 들어있었다. 무사히 작동하는지, 문제는 없는지, 설계대로 제조되어 있는지를 보기 위해 문을 열어 달라 요구했다. 휴일이라 안 된다, 담당자가 부재중이다, 나중에 서류로 제출하겠다며 난색을 표하는 걸 겨우 설득했다.


“여기 이거 어떻게 열지?”

“누가 좀… 박 부장 이거 어떡해야 되는 건가?”

“정 실장, 여기 누가 관리하지? 자물쇠가 채워 있잖아.”

“윤 팀장, 오늘 담당자 누구야? 전화해봐.”

“본부장님 여기 근무자가 지금 교대 중이라…”

“아니 열쇠는 있을 거 아냐. 이봐, 최 차장!”



휴일 아침부터 국회의원과 취재진이 들이닥쳤으니 당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한 명이 걷기에도 비좁은 통로에 간부, 임원, 발전팀, 정비팀, 제어팀, 홍보팀 등 수많은 인원이 뒤섞여 혼잡스러움은 극에 달했다. 여기저기 한참을 수소문한 끝에 방호복을 입은 실무 직원 둘이 거대한 열쇠 꾸러미를 들고 나타났다. 얼핏 봐도 30~40개는 됨직한 열쇠를 하나씩 차례로 꽂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지만 이 변압기는 긴급한 사태가 터졌을 때 그 즉시 대응하기 위해 설치된 시설이다. 시급을 요하고 촌각을 다투며 1분 1초를 서둘러야 하는 극한의 상황에서 즉각 가동되어야 하는 비상시설인데 문을 열어 달라 요청한 지 15분이 지날 즈음, 드디어 딸칵! 소리가 났다. 자물쇠를 손에 쥔 채 잠시 주저하던 직원이 황망하게 입을 열었다.


“이거… 안 잠겨 있는데요?”

“…??!!”


캐비닛은 애당초 잠겨있지 않았다. 자물쇠는 걸쳐져있기만 했던 거다. 직원은 물론 임원들의 표정에서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 뭐 사람이 너무 당황하다 보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 아니, 그럴 수 없지! 수십 수백만 명의 목숨이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무시무시한 핵시설인데 캐비닛 문 하나 제때 못 열어서 허둥대다가 한참 후에 하는 소리가 사실은 처음부터 열려있었다고? 우리 이런 곳을 믿고 살아가고 있었던 거야? 이걸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20분째 무거운 카메라를 메고 있던 오른쪽 어깨가 뻐근하게 결려왔다.






화창한 가을 아침. 자전거를 타고 발전소로 막 출근하려는 아버지를 뒤쫓아 나온 여고생 딸이 “아빠! 미나미가 정성껏 싼 도시락 잊었잖아!” 라며 쀼루퉁하게 핀잔을 준다. 온화한 미소와 함께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차차, 마지막 근무 날이라고 아빠가 긴장했나 봐 허허. 이따 정년퇴직 축하 저녁식사에는 절대 늦지 않을게 미나미.” 그 모습을 주방에 난 작은 창문을 통해 흐뭇하게 바라보는 어머니의 옆모습…


보통이라면 이렇게 행복한 주인공 가족의 일상을 보여주면서 시작하는 게 재난 영화의 기본 흐름일 텐데 이 작품은 다르다. 배경 설정도 인물 소개도 그 어떤 미사여구도 필요 없다. 시작하자마자 대지진이 후쿠시마 원전을 강타하더니 이내 쓰나미가 모든 걸 뒤엎어버리는 절망적인 상황이 벌어지기까지 10분이 채 안 걸린다. 영화 <후쿠시마 50>은 이렇게 급박하게 시작된다.



우리는 그날 후쿠시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이미 잘 알고 있다. 방송과 신문을 통해 많은 자료를 접했다. 하지만 텍스트로 기록된 사고조사기록을 읽는 것과는 달리 살아 숨 쉬는 인물들의 표정과 행동, 대사를 통해 사고 현장을 지켜보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무능하지만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뻘짓들을 했는지가 작품 2시간 내내 적나라하게 나오기 때문이다.


원자력발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저 낙하산으로 자리만 꿰찬 고위 간부, 현장과는 상관없이 무의미하게 계속되는 회의, 지지율이 떨어지면 안 되니 다짜고짜 대책부터 내놓으라 다그치는 총리, 사고 발생 5시간이 훌쩍 지난 후에야 선포되는 비상사태, 아무런 이유도 말해주지 않은 채 강행되는 주민 대피령, 현장에선 모두 목숨 걸고 뛰고 있는데 방사능 대책인 요오드화칼륨이 비싸니 40대 이상의 늙은 직원들에게는 제공하지 않겠다는 회사, 출동한 비상발전차량의 전압과 발전소 냉각기의 전압이 달라 연결이 안 되는 황당한 상황, 방사능을 공기 중으로 무작정 방류해 큰 폭발이라도 막자는 정부, 소방대와 군인이 한창 작업을 해야 하는데 총리 의전 때문에 올 스톱되는 현장, 원리원칙 따윈 가볍게 무시하는 고위 관료들… 끝이 없다.



원자로의 온도와 압력이 계속 올라 이대로라면 동일본 전체가 초토화될 수도 있는 상황.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바닷물이라도 끌어와 노심을 식혀야 하는데 도쿄전력의 수뇌부는 해수 살포를 금지시킨다. 원자로에 바닷물이 들어가면 그 원전은 망가져 폐기되고 이는 곧 막대한 손실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사고 초반에 발 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 찬스가 분명히 있었지만 결국 문제는 돈! 당장 들어갈 비용이 아까워 주저하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방사능에 오염되고, 삶의 터전을 잃은 데다가 전 세계 바다에 방사능 오염수가 흘러들어 가는 최악의 결과마저 초래한다.


일본에서 제작한 상업영화이기에 실제 일어난 일보다 꽤 많이 순화했는데도 이 정도다. 은폐, 왜곡, 책임회피, 무사안일의 총집합. 작품을 보는 내내 스트레스 지수가 상승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둠이 있다면 어딘가 빛 또한 존재하는 법. 암울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자기 자리를 지키며 소명을 다한 이들의 모습도 정성껏 담겨있다. 원자로 폭발, 방사능 비산으로 위험해지자 800명에 달하는 후쿠시마 발전소 직원 대부분이 대피하지만 50여 명의 결사대만큼은 현장에 남아 가족과 마을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까지 사투를 벌인다. <후쿠시마 50>은 남겨진 50명의 직원에 대한 기록이다.



폭발을 막기 위해선 원자로에 들어가 밸브를 열어 압력을 방출하는 벤팅 작업을 해야 한다. 원자로 안은 방사능이 가득하고 전력이 끊겨 앞이 보이지도 않는다. 좁고 복잡한 미로를 통과해 수작업으로만 진행해야 하기에 ‘위험하다’ 라는 4글자로 표현하는 게 미안할 정도로 죽음을 무릅써야 하는 상황. 서로 눈치만 볼뿐 선뜻 지원하지는 못한다. 살고 싶은 욕망이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한다. 누군가는 해야 하니 어쩔 수 없이, 하기 싫지만 별 도리가 없으니까, 혹은 제비뽑기에 걸려서. 원치 않았지만 어쩌다 보니 영웅이 되어버린 사람들. 20분간 작업하고 돌아와 피폭량을 재어보니 95mVs다. 대한민국 방사선작업 종사자의 연간 피폭한도가 20mVs인 걸 감안하면 고작 20분 만에 5년 치 방사능을 뒤집어쓴 셈이고 일반인 기준으로 보면 무려 95년 치를 피폭당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공포와의 싸움. 생명을 건 이들의 의지가 하늘에 닿았는지 원자로의 압력은 조금씩 내려가 더 이상 큰 폭발은 일어나지 않을 만큼 안정된다. 해낸 것이다. 앞으로 수십 년에 걸쳐 사고 수습은 계속되겠지만 일단 큰 불은 어느 정도 잡은 것이다. 47만 명에 달하는 이재민과 전 세계에 민폐를 끼친 후쿠시마 원전사고에 대해 일본국회 사고조사위원회는 ‘자연재해가 아닌 명백한 인재’ 였다고 결론 내렸다. 하지만 도쿄전력이든 정부든 어느 쪽도 책임은 지지 않았고 기소된 경영진들조차 2019년 9월 전원 무죄를 선고받는다. 인재인 건 분명하지만 벌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일본식 해피엔딩. 짜잔~!



돈, 돈, 오로지 돈을 위해서라면 수십 수백만 명의 생명 정도는 얼마든지 농락할 수 있다는 배금주의로 뒤덮인 세상. 자연의 거대함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인간들인 주제에 서로 힘을 합치기는커녕 일단 나만 잘 살아보겠다는 눈빛으로 번들거리는 사람들이 잔뜩 등장하는 영화라 어떤 의미에선 어지간한 호러영화보다도 무섭다.


2021년 현재, 지구 상에는 686개의 원전이 존재한다. 지금 당장 처리할 기술도 없으면서 극도로 위험한 고준위 핵폐기물을 잔뜩 싸질러놓고 ‘후손들아, 한 100~200년쯤 후에는 과학이 많이 발전해있겠지? 그때 너희들의 첨단기술로 어떻게든 잘 한 번 해결해보렴’ 하고 무책임하게 떠넘겨도 괜찮은 건지. 그렇다고 당장 다른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니 최대한 조심스레 안전 관리하면서 원전을 계속 가동하는 게 맞는 건지. 자연재해 한 방에 한 국가가 멸망할 수도 있는 무시무시한 시한폭탄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게 상식적인 행동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에서 옆자리에 앉은 M선생님을 바라보았다. 거대기업과 한수원을 상대로 승산 없는 싸움을 몇 년째 이어가는 동안 회사에선 해고당하고 계속되는 소송에 심신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아주 조금만 비겁하면 우수한 연구원으로 높은 연봉과 장밋빛 인생이 펼쳐져 있었는데 왜 그걸 마다하고 험난한 가시밭길을 선택했을까. M선생님은 대부분의 내부고발자나 공익신고자들이 그러하듯 스스로 망친 인생, 제 손으로 꼬아버린 삶이 자기가 생각해도 우습다는 듯 허탈한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딸아이를 볼 때마다 마음이 영 불편했어요. 이 꼬마가 앞으로 백 년 가까이 살아가야 하는 세상인데 이렇게 위험한 걸 알면서도 모른척하고 그냥 방치한다는 게… 차마 그렇게는 못하겠더라고요.”


원전은 어려운 문제다. 전문가와 학자, 정부, 시민단체 등이 오랜 토론과 논의를 거쳐 합리적인 방향으로 잘 결정해주길 바랄 뿐이지만 그래도 최소한, 비상시를 대비한 변압기 캐비닛이 잠겨있는지 열려있는지 정도는 숙지한 상태에서 원자력발전소를 운영해줬으면… 하는 정도의 작은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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