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엔의 사랑> 2014
밤 11시. JR신주쿠역 야마노테선 플랫폼에는 사람이 많았다. 주말이었다면 데이트를 마친 청춘남녀나 터지기 일보직전으로 물건이 가득 담긴 돈키호테 비닐봉지를 양손에 든 관광객들이 많았겠지만 평범한 수요일 밤인지라 귀가를 서두르는 직장인이 대부분이었다.
술 담배 냄새를 풍기며 비틀거리는 중년의 아저씨. 제대로 서있지도 못해 앞뒤로 몸을 휘청거리는 모습이 위태위태했다. 오늘 하루 뭔가 힘든 일이라도 있으셨나? 주변을 둘러보니 술이 아니어도 삶의 피로에 취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상식과 교양이 있는 성인들답게 입을 앙 다문 채 아무런 내색은 않고 있지만 다들 오늘 아침 출근 때보다 어깨가 3cm 정도는 처졌겠지. 야키니쿠 냄새, 달착지근한 간장 냄새, 땀과 섞인 레노아 섬유유연제 냄새가 둥실둥실 플랫폼을 떠다녔다.
피곤에 찌든 직장인들 한복판의 나 또한 그들과 다르지 않다. 취업도 걱정이고 유학생활을 이어가야 할지 접을지도 고민인 데다 사랑은 여의치 않고 인간관계는 실망의 연속이며 생활비는 빠듯하다. 삶이라는 커다란 벽에 맞서 어떻게 승부해야 좋을지, 승부를 할 수 있기는 한 건지, 모든 게 갈팡질팡 무섭기만 했다.
그때 건너편 빌딩 사이에서 경쾌한 벨소리가 울렸다. "뎅~!" 무슨 소리인가 한참 두리번거린 끝에 시선이 닿은 곳은 체육관이었다. 신주쿠역과 맞닿은 낡은 건물의 5층 정도에 위치한 작은 복싱체육관에서 라운드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안에는 열 명 정도의 남녀가 가벼운 복장을 하고 땀에 흠뻑 젖은 채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팔을 뻗고 있었다. 몇몇은 스파링이라도 하는지 서로를 향해 날카롭게 주먹을 휘둘렀다.
직선거리로 치면 30미터도 채 되지 않을 만큼 가까운데 양쪽의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이쪽 사람들은 하나같이 강제노역을 힘겹게 마치고 수용소로 돌아가는 전쟁 포로의 표정을 짓고 있는데 저쪽 사람들은 달랐다. 힘차게 내뻗는 주먹에서는 약동하는 생명력이 물씬 느껴졌고 줄넘기를 하는 단순한 동작에서도 건강한 에너지가 뿜어져 나왔다. 스파링을 뛰던 젊은 청년은 상대의 레프트 스트레이트에 정통으로 한 대 맞고도 뭐가 그리 신나는지 깔깔대며 서로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웃음소리와 미트질 소리, 줄넘기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라운드가 끝났는지 뎅-! 하는 종소리가 다시 들렸다. 나와 주변 사람들은 초점 잃은 멍한 눈으로 복싱체육관을 한참이나 응시했다. 저들은 지금 아주 좁은 체육관 안에 갇혀서 운동 중이고 우리는 뻥 뚫린 신주쿠역 한복판에 서있다. 마음만 먹으면 요코하마든 사이타마든 어디든 갈 수 있다. 그런데 우리보다 저들이 훨씬 더 자유로워 보이는 건 왜일까.
내 몸뚱이. 그중에서도 오직 두 팔만 이용해 눈앞의 상대와 1:1로 승부한다. 여기에는 그 어떤 의문이나 확신도 없다. 그냥 전력으로 부딪히는 거다.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지만 그런 건 나중 일이고 일단은 링에 오르기로 마음먹은 거다. 눈앞에 놓인 자신의 삶에 당당하고 씩씩하게 마주하고 있는 저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보니 어느 틈엔가 신오오쿠보행 외선순환 열차가 도착했다. 젖산이 잔뜩 쌓인 피로에 찌든 몸으로 전동차에 오른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혹시 빈자리는 없는지 이쪽저쪽 두리번대기 시작했다.
32살의 백수 여자 사이토 이치코에게 삶이란 별다른 의미가 없다. 부옇고 희미한 일상의 연속. 어머니 도시락 가게에 얹혀살고 있지만 일은 귀찮고 줄담배, 만화책, 게임으로 하루하루 때울 뿐이다. 친구도 애인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되고 싶은 것도 없다. 퉁퉁한 몸뚱이와 부스스한 머리를 벅벅 긁으며 되는대로 꾸역꾸역 살아가는 고독한 인간.
어머니: 빨리 밥 먹어. 오늘 치과 가는 날이지?
이치코: 저절로 나았어. 반년 안 가는 동안에.
어머니: 입에서 하수구 냄새나. 치주염은 저절로 낫는 게 아니라니까. 애인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그래?
여동생: 쟤한테 애인이 생길 리가 없잖아
이치코: 어,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남자친구 같은 건 안 만들 거야.
여동생: 안 만드는 게 아니라 못 만드는 거지. 그건 그렇고 너 누구 돈으로 치과 가는 거야? 올해 몇 살이야 도대체? 부모한테 치과 간다고 말할 나이냐?
이치코: 아, 그러니까 안 간다고 했잖아!
이혼 소송 때문에 아이와 함께 신세를 지러 온 여동생 후미코와 밥상까지 뒤엎으며 시원하게 한바탕 한다. 그 결과 홧김에 집을 뛰쳐나와 독립을 하게 된 그녀. 생계를 위해 집 근처 100엔샵 [백엔생활]에서 심야 알바를 시작하게 되면서 그녀의 삶은 아주 조금씩 달라진다.
알바를 하러 다니는 길에 있는 복싱체육관. 땀을 뻘뻘 흘리며 샌드백을 치는 한 남자는 언제나 백엔샵에 와서 바나나를 사 간다. 안면을 트자 이치코에게 데이트 신청을 한 그와 단둘이 동물원에 놀러 가게 되지만 분위기는 영 심드렁하다. 왜 함께 오자고 했는지 묻는 그녀에게 그는 대답한다.
이치코: 그런데 왜 나랑 같이 여기에 오자고…
카노: 그냥, 너는 거절 안 할 거 같아서. 혹시 화났어?
이치코: 아니요 괜찮아요.
카노: 따분하네 정말…
이렇게 그 또한 떠나간다. 공허한 마음에 찾아간 체육관에 등록을 하고 이치코는 복싱을 배워보기로 한다. 주먹 쥐는 법부터 하나하나 차근차근. 그리고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그녀는 달라진다. 살이 좀 빠졌다느니 다이어트에 성공했다느니 하는 차원이 아니다. 이치코는 처음으로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과 온전하게 마주 한다. 뭐 하나 가진 거 없고 잘하는 것도 없다는 걸 겸허히 받아들인 것이다.
32살. 보통 여자선수들이면 은퇴할 나이라는 관장의 만류에도 이치코는 시합을 잡아 달라 조른다. 사각의 링 위에 서려는 것이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아침 일찍 일어나 집 근처를 뛴다. 바람피우느라 자기를 떠나간 옛 남자를 길에서 만나도 화내지 않는다. 그럴 시간조차 아깝다. 시합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덥수룩한 머리는 싹둑 자르고 어머니 도시락가게 이름이 적힌 탑을 당당하게 차려 입고는 링에 오른다. 음식을 머리에 들이부으며 싸웠던 여동생은 물론 조카와 가족들, 떠나간 남자, 체육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치코의 싸움이 시작된다. 전력을 다해 주먹을 뻗는다. 만신창이가 되도록 두드려 맞지만 그래도 포기 않고 최선을 다한다.
왜 복싱을 시작했냐는 물음에 이치코는 말한다. 서로 잔뜩 치고받고 난 다음에 어깨 두드려주는 그런 게 하고 싶었다고. 경기가 끝나면 적도 아군도 아니고 원한 같은 것도 없다. 이치코와 상대 선수는 서로를 한참이나 끌어안고 인사한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토닥토닥. 10분 남짓한 승부를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얼마나 노력했을지 둘 다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합은 끝났지만 이치코의 삶이 하루아침에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그녀는 내일도 도시락가게에서 500엔짜리 히레카츠 도시락을 만들 테고 일상은 지금까지와 비슷하게 흘러가겠지. 행복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고 단언할 순 없지만 지금까지와 마냥 똑같지도 않을 것이다. 그녀는 스스로의 손과 발로 인생이라는 깊은 바다에서 헤엄치는 법을 이제야 터득했다. 아직 많이 서툴지만 일단 바다에 뛰어든 이상,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라도 바지런히 움직일 게 분명하다.
もうすぐこの映画も終わるこんなあたしの事は忘れてね곧 있으면 이 영화는 끝나니까 나 같은 건 잊어줘
これから始まる毎日は映画になんかならなくても普通の毎日で良いから이제부터 시작되는 하루하루가 영화 같진 않겠지만 그런 평범한 일상도 나쁘진 않아
痛い痛い痛い痛い痛い痛い痛い痛い痛い痛い痛い痛い痛い痛い痛い痛い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でも하지만
居たい居たい居たい居たい居たい居たい居たい居たい居たい居たい居たい居たい居たい居たい居たい居たい살고싶어 살고싶어 살고싶어 살고싶어 살고싶어 살고싶어 살고싶어 살고싶어 살고싶어 살고싶어 살고싶어 살고싶어 살고싶어 살고싶어 살고싶어 살고싶어
이타이(痛い) 하지만 이타이(居たい). 생은 분명 아프지만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살아보고자 하는 그녀 마음의 소리가 스피커가 찢어져라 울려 퍼지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제목 <100엔의 사랑>에서 <사랑>이 처음에는 떠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남자, 밉지만 그러면서도 좋아하는 한 남자에게 하는 표현이라고 생각했는데 보면 볼수록 이 사랑은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한 마음으로 느껴지는 건 왜일까.
복싱을 하게 되면서 이치코는 스스로를 한 100엔쯤은 좋아하게 된 것 같다. 편의점에서 메론빵 하나 살 정도밖에 안 되는 금액이지만 그래도 그게 어디야. 운동하길 잘했다. 꿋꿋하게 살아가다 보면 자기를 아끼는 마음이 조금씩 더 커질지도 모른다. 그러다 나중에는 어쩌면 고베규카츠 정식세트 3050엔 만큼이나 스스로를 사랑하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지. 3050엔의 사랑(세금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