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사전> 2013
꼬꼬마 중학생 시절 간 해외여행지 일본. 낯선 언어와 사람들, 처음 맛보는 라멘과 초밥, 휘황찬란한 게임과 애니메이션에 흠뻑 빠진 3박 4일의 일정은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버렸다. 돌아오는 날, 하네다 공항에 가기 위해 시나가와역 플랫폼에서 급행열차를 기다렸다. 평일 오전이라 그런지 사람도 별로 없고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화창한 도쿄의 여름 하늘을 올려다보며 즐거웠던 여행의 여운을 되새기고 있을 무렵, 4~5미터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한 여학생을 발견했다. 내 또래? 어쩌면 조금 더 위? 중학생인지 고등학생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얀 셔츠에 군청색 교복 치마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여자 아이였다.
긴 생머리는 단정하게 빗어 묶었고 한쪽으로 메는 가방에는 귀여운 캐릭터 인형이 달려있었다. 하얀 양말에 대비되는 까만 로퍼는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해 선생님 말씀 잘 듣는 모범생 느낌이 물씬 풍겼다. 온몸으로 ‘저 성실해요’ 라고 말하고 있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일본 여학생이었다.
뽀얗고 맑은 얼굴 한가운데 보기 좋게 자리 잡은 예쁜 눈썹이 조금씩 옴짝거렸다. 귀여운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뭔가 수심이 가득한 표정의 그녀가 조금씩 나를 향해 걸어왔다. 한걸음, 반걸음. 주춤주춤 가까워지면 질수록 힐끗거리며 이쪽을 훔쳐보는 소녀의 불안한 시선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당황했다. 난 이제 곧 멀리 떠날 사람. 근데 이렇게 적극적으로 다가온다고? 이걸 어째야 하지? 난 일본어도 못하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그녀와 나 말고는아무도 없다. 가방 손잡이를 잡고 있는 두 손을 잠시도 가만두질 못해 꼼지락거리면서도 여학생은 내 바로 앞까지 당도해왔다.
주저하는 게 느껴졌다. 부끄럽다는 듯 연신 주변을 살핀다. 이내 땅바닥을 내려다보고는 초조하게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뭔가를 굳게 결심한 듯 얼굴을 붉히며 새초롬한 입술을 천천히 움직였다.
“あの… いいですか?”
평범한 한국 청소년이라 일본어는 못하지만 그래도 다년간의 일본 게임과 만화로 어느 정도는 단련된 몸이다. 이 여학생은 분명히 지금 나한테 수줍게 물었다. 이건 "좋습니까? 좋아요?" 라는 뜻이다. 이 정도는 안다. 한껏 부끄러워하며 나에게 자기가 좋은지 물어본 것이다. 인생 첫 고백을 JR시나가와역 플랫폼에서 받는 순간. 이렇게 하이틴 로맨스 같은 사건이 나에게 일어날 줄이야!
“はい、いいです!”
한껏 목소리를 높여 나 또한 좋다고 대답했다. 사나이라면 이렇게 귀여운 여학생의 고백을 거절할 수 없지. 당장에라도 한국행 비행기표를 취소할 기세로 씩씩하게 대답하자 여학생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더니 재차 “え…ちょっと、いいですか?” 라고 물었고 나는 다시 한번 우렁차게 대답했다. “はい!本当にいいです!(네 정말로 좋아요!)”
이렇게 몇 번의 사랑 고백(?)을 주고받는 동안 귀염둥이 여학생의 표정은 점점 더 굳었고 나를 어딘가 좀 이상한 사람으로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적인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순간 전차가 역에 들어오고 있다는 안내가 울려 퍼지자 소녀는 더는 못 참겠다는 듯 팔로 나를 슬쩍 밀어내더니 내 바로 뒤에 있던 자동판매기에 100엔을 집어넣고 포카리스웨트를 한 캔 뽑는 게 아닌가.
덜컹! 하고 떨어진 음료수를 집어 든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내게서 멀어져 갔다. 그냥 여기서 타도 되는데, 여기도 전차 문 열리는데…? 기분 나쁜 사람 근처에 잠시라도 더 있기 싫다는 듯 내 쪽을 계속 힐끔거리며 한참을 도망치듯 떠나갔다. 뭔가 좀 억울하다. 일본어 못하는 게 죄는 아니잖아!
나중에 알았지만 그녀가 말한 '좋습니까' 는 '(제가 이 자판기를 사용해도) 좋습니까? 이것 좀 쓸게요' 라는 의미였다. 그것도 모르고 환하게 웃으며 '정말로 좋습니다!' 라는 고백 아닌 고백을 하며 자판기 앞에서 비키지 않고 히죽대고만 있었으니 여학생은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한참 주저한 걸 보니 모르는 사람에게는 말도 잘 못 거는 부끄럼쟁이 사춘기 소녀였던 것 같은데.
잠시나마 꿈꿨던 국제연애는 그렇게 김칫국만 마신 채 끝나버렸다. 억울한 마음에 사전을 찾아봤는데 いい 【良い】 는 분명 '좋다' 라는 뜻인 게 맞다. 하지만 단순히 사전적 의미에서 끝이 아니라 실제의 용례와 활용은 무궁무진하고도 변화무쌍하다는 것. 말을 잘한다, 그중에서도 외국어를 잘한다는 게 어떤 건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만들었던 중학교 2학년 어느 뜨거웠던 여름날의 추억.
드라마틱한 사건도 없고 눈물이 줄줄 흐르는 격정적인 로맨스도 없다. 십여 년이 훌쩍 넘는 시간에 걸쳐 보다 정확한 ‘국어사전’ 하나 만들어 보겠다고 분투하는 출판사 사람들의 이야기. <행복한 사전>은 주변 사람들에게는 좀 이상하게 보이더라도 고집스레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사전편집부 괴짜들의 행보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차분하게 지켜보는 작고 따뜻한 영화다.
1995년. 삐삐와 핸드폰, 컴퓨터의 보급과 함께 무서운 속도로 급변하는 정보화 시대. 신인류의 등장으로 사람들이 쓰는 말 또한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새로운 유행어나 신조어도 폭발적으로 늘어만 간다. 겐부출판사 사전편집부 사람들은 이렇게 복잡한 시대일수록 말의 기준을 잡아줄 수 있는 정확한 사전이 필요하다 믿어 의심치 않는다.
출판사에 취직했지만 영업에는 아무래도 소질이 없는 청년 ‘마지메 미츠야’. 밥을 먹을 때마저 손바닥만 한 문고본 책을 내려놓는 일이 없을 정도로 글을 좋아하는 마지메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사전편집부에 배치된다. 그와 때를 맞춰 ‘대도해’라는 거창한 이름의 사전 만들기 프로젝트도 함께 시작된다.
마츠모토: 말은 태어나고 걔 중엔 죽어가는 것도 있죠. 그리고 살아가는 동안 변해가는 말도 있습니다. 말의 의미를 알고 싶다는 건 누군가의 생각이나 감정을 정확히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과 이어지고 싶다는 소망 아닐까요? 그래서 저희들은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전을 만들어야 합니다 (…) 말의 바다 그것은 끝없이 넓지요. 사전이란 그 대해에 떠있는 한 척의 배. 사람들은 사전이란 배로 바다를 건너고 자신의 기분을 정확하게 표현해줄 단어를 찾습니다. 유일한 말을 찾는 기적. 누군가와 이어지고 싶어서 거대한 바다를 건너려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사전. 그것이 ‘대도해’ 입니다.
사전편집부 사람들은 끊임없이 단어를 채집한다. 목표는 100만 개 이상의 단어! 애휼, 무연, 이단자 같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단어는 물론 구리다, 쩐다, 대박 같은 경박한 말들도 빠트리지 않는다. 제작 도중에 위기가 없지는 않다. 전자사전의 등장으로 종이사전의 판매량은 갈수록 줄어드는 시대. 돈이 되지 않는 국어대사전 프로젝트가 송두리째 엎어질 난관이 닥쳐오기도 하지만 모두의 합심으로 슬기롭게 헤쳐 나간다.
십 수년이 넘게 이어지는 기나긴 작업인지라 도중에 퇴사하는 사람, 새로 투입되는 사람,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주인공 마지메는 하숙집 할머니의 손녀인 카구야에게 한눈에 반해버리기도 한다. 사람과의 관계에 서툴고 말주변도 없는 그는 아무것도 못한 채 끙끙 앓기만 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끼는 기분. 사전을 아무리 찾아봐도 명확하게 이해가 안 되는 감정. 사랑이다.
마츠모토: 일이 손에 안 잡힐 정도면 안 됩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감정을 멈출 수도 없는 법. 사랑이라… 그럼 ‘사랑’의 해설은 마지메씨가 쓰도록 하죠. 분명 생생한 해설이 나올 겁니다.
글에 파묻혀 사는 마지메답게 그녀를 향한 연모의 마음을 편지에 붓으로 꾹꾹 눌러 담아 전달한다. [삼가 아룁니다. 천고마비의 가을. 더욱 고성하시길 기원합니다. 처음으로 쓰는 연서라 필경 놀라셨을 거라 사료됩니다만 (…)] 주변의 우려와는 달리 문장의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진심은 통한다.
자그마한 결점이라도 그냥 넘어갈 수 없다며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완벽에 가까운 퇴고와 교정 작업을 진행한 결과, 무려 15년 만에 국어사전 ‘대도해’가 완성된다. 이들에게 사전은 단순히 단어들을 잔뜩 채워 넣은 두꺼운 책이 아니다. 저마다의 인생과 삶, 진심 어린 말과 글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간 시대정신 그 자체다.
모호한 낱말을 어떻게 풀이해야 하는지, 복잡한 말속에 어떠한 뜻이 담겨있는지, 평범해 보이는 문장이지만 어떤 의도가 숨어있는지… 발화하는 순간 훨훨 날아가 버리는 단어들을 고이고이 붙잡아 어떻게든 정확하게 정의하고자 하는 고집쟁이들의 영화 <행복한 사전>. 인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큰돈을 버는 것도 아니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을 향해 우직하게 걸어 나가는 활자중독증 보유자들의 귀여운 이야기. 마지메가 정의한 ‘사랑’의 뜻풀이로 마무리해본다.
사랑: こい 【恋】한 사람을 좋아하게 되어 자나 깨나 그 사람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다른 일은 손에 잡히지 않아 몸부림칠 것만 같은 마음의 상태. 이뤄지면 하늘에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