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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모단 May 03. 2022

폭주족의 품에서 나는 향기


일본 관서지역 최대의 유흥가 오사카 도톤보리. 난바역을 중심으로 한 욕망의 거리는 자정이 넘은 시간에도 뜨겁게 타오르며 불야성을 이뤘다. 흥청망청 취해 비틀거리는 일본의 아저씨들 사이를 중학생이던 난 겁도 없이 요리조리 피해 다니며 버블시대의 정취가 남아있는 골목길을 서성댔다. 생애 첫 해외여행의 마지막 날 밤이었다.


골방처럼 작은 이자카야들이 거미줄처럼 촘촘히 늘어선 풍경. 가게 안에선 꼬치구이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고 청춘남녀들은 억센 간사이 사투리로 유쾌하게 떠들어댔다. 어른의 세계를 슬쩍슬쩍 엿보며 걸음을 옮기다 보니 아주 좁은 뒷골목에 이르렀다.


건장한 어른이라면 둘이 나란히 걷기도 힘들 정도로 협소한 데다 쌓아둔 식재료와 술병, 테이블 같은 게 널브러져 있어 왜소한 나도 지나가기 여의치 않았다. 신속하게 지나 휘황찬란한 유흥가 투어를 계속하려 했는데… 어둡고 긴 골목의 딱 중간 즈음 사람들이 잔뜩 앉아있는 것이 눈에 어슴푸레 들어왔다.


20대 초중반?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인생에서 가장 막 나가고 무서울 게 없는 질풍노도 나이대의 청년 예닐곱이 길목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삭발, 금발, 새빨갛게 바짝 쳐올린 리젠트, 뾰족뾰족, 호일펌… 주렁주렁 체인을 달고 있는 사람, 찢어진 바지, 워커, 문신. 어떤 이는 맨몸에 가죽조끼만 걸치고 있었는데 가시 같은 게 잔뜩 박혀 있었다. 메… 메탈 음악 같은 걸 하시는 분들인가?


으르렁대듯 가래 끓는 목소리로 서로 대화를 하는데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으니 더 무서웠다. “아까 걔 피 토할 때 이빨도 빠지더라?” “뒤에서 후렸을 때 척추뼈 부러지는 소리 나던데 킬킬”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것만 같아 잔뜩 쫄아버린 순간, 불청객이 다가오는 걸 눈치챘는지 그중 몇이 안 그래도 찢어진 눈을 한껏 치켜뜨며 나를 쏘아봤다. 


몸의 모든 감각이 더 이상 이 앞으로 가면 안 된다고 경고했다. 큰일 난다. 부들거리며 걸음을 멈췄다. 빨리 사과하고 물러서야 하는데 쉽게 발이 안 떨어진다. 기어이 폭주족 모두가 나를 째려본다. 인천 변두리 중학교의 일진들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되는 이 박력! 기세! 위압감! 당장에라도 주머니에 있는 천 엔짜리를 몽땅 꺼내 두 손 공손히 바치라고 대뇌 속 생존 센서가 바삐 울린다.

 

어버버대는 순간 뒤에서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기습인가?! 종종걸음으로 나를 향해 걸어오는 건 아주 왜소하고 삐쩍 마른 체구의 일본 할아버지 한 명. 유행이 좀 지난 단정한 쓰리버튼 정장에 트렌치코트까지 정갈하게 차려입고 손에는 서류가방, 얼굴엔 두꺼운 뿔테안경. 정년퇴직을 한 1~2년쯤 앞두고 있고 이름은 사토 아니면 다나카일 것만 같은 느낌. 


그런 그가 겁도 없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폭주족 무리는 나 하나만으로도 신경이 거슬렸는데 늙은이까지 가세하자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담배를 집어던지고 침을 뱉으며 한 명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큰일이다! 할아버지와 함께 도망쳐야 한다! 그러나 미처 손쓸 틈도 없이 할아버지는 내 옆을 스쳐 불량배들 쪽으로 거침없이 향했다.


폭주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글대는 눈빛으로 할아버지를 노려봤다. 늙은 임팔라 한 마리를 사냥하기 직전의 사자 무리다. 경찰! 경찰을 불러야 한다! 하지만 늦었다. 할아버지와 불량청년들은 좁디좁은 골목에서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바로 그 순간! 청년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주섬주섬 몸을 벽에 붙여 길을 터 주었다. 양쪽으로 일사불란하게 밀착하니 그 사이로 한 명 정도는 충분히 지나갈 수 있는 통로가 확보됐다. 


할아버지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아이고 미안해서 어쩌나, 고마우이’ 같은 분위기의 말을 건네며 지나갔다. 대형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아무런 린치를 당하지 않은 채 저편으로 유유히 지나갔는데도 폭주족들은 2열 종대의 자세를 풀지 않았다. 왜냐고? 내가 아직 남았으니까.


멀뚱멀뚱 서있는 나를 의아한 듯 쳐다보는 징 박힌 가죽조끼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소년, 너는 안 지나가니?’ 라고 부드럽게 말을 걸어주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들 사이로 슬금슬금 걸어 들어갔다. 무시무시한 폭주족들 사이를 지나는데 피와 땀, 분노와 아드레날린 냄새가 아닌 화사하고 달콤한 플로랄 계열의 섬유유연제 향기가 나는 게 아닌가! 할아버지가 그랬듯 길을 비켜준 것에 대한 감사로 목례를 하면서 지나가자 그들 중 몇몇도 나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무사히 골목을 통과하고 돌아봤다. 폭주족들은 등에 뭍은 먼지를 털더니 우르르 원래의 지정석에 앉아 세븐스타 담배를 꼬나물었고 자기들끼리 뭐라 뭐라 다시 격하게 떠들어댔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었던 거지? 이 나라는 확실히 뭔가 좀 오묘하고 특이하다. 앞으로 더 알아보고 싶다. 이때부터가 시작이었던 것 같다. 애틋하면서도 짜증 나는 애증의 대상, 일본과의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기구한 인연.


할아버지에게 길 터주며 목례하는 펑크족들의 나라라니 이 얼마나 유쾌한 연구주제인가. 아주 긴 호흡으로, 평생을 들여 추적관찰을 한 번 해보기로 했다. 명확한 결론 같은 건 나오지 않을 뜬구름 같은 테마지만 지금까지 한 20년 정도 지켜본 바로는 흥미진진하고 유쾌하면서도 지독하리만치 고독한 나라라는 것 정도?

자, 앞으로도 관찰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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