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고서를 생각합니다.
영국 유학시절 저는 도시계획과 지역경제개발이라는 두 개의 학위과정을 공부했습니다. 두 과정을 이수하는 동안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포스터나 브리프(brief) 형태로 만들어 설명하고 설득하는 과제가 심심치 않게 있었습니다.
예컨대, 특정지역을 새롭게 개발해야 하는 미션이 주어지면, 해당지역의 역사적 배경, 사회경제적 상황을 연구하고, 그에 따라 '내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개발의 방향'을 몇 장의 문서나 포스터에 설득력있게 구현하는 것입니다. 내용 이해를 돕기 위해 사진이 들어가기고 하고, 통계자료나 도면이 들어가기도 합니다. 예쁘게 편집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공직에 돌아와 일하는 동안 보고서를 만드는 것도 유학시절 경험한 여러 코스웍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내가 생각하는 바가 맞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상대방이 내가 생각한 방향대로 결정할 수 있도록 설득하는 작업"이 바로 보고의 과정이라고 생각됩니다.
한참 앞선 글에서 설명드렸듯 "보고는 책임지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제대로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도록 돕는 조직차원의 지원활동"입니다. 보고에 활용되는 '보고서'는 보고를 하는 사람과 보고를 받는 사람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도구에 해당합니다. 두 사람이 긴 시간 얼굴을 맞대고 일일이 설명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거친다는 것은 조직 내에서 사실상 어려운 일이므로 '보고서'라는 도구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중요성이 낮은 사안들도 일일이 보고 문서를 만들어 보고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합니다. 시대가 변하듯, 공직 내 조직문화와 일하는 방식도 변하고 있습니다. 일일이 문서를 만들어 보고하는 대신 문자보고나 구두 보고도 일상화되고 있습니다.
최상위 결정자에게 보고서를 통해 보고하는 것이 특정 부서를 제외하고는 그리 일상적인 일은 아닙니다. 보고를 하는 경우에도 최상위 책임자가 알아야 할 만한 것들을 간추려서 보고하게 되죠. 파급력이 크고 기관차원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핵심 업무라면 보고를 통해 그 업무가 지금 어떻게 추진되고 있고, 앞으로 어떻게 할 계획인지를 책임지는 사람이 알게 합니다. 이러한 과정이 있어야 기관의 책임자는 현재의 상황이나 내용을 제대로 알 수 있고 향후 업무나 정책방향도 제대로 고민하고 결정할 수 있습니다. 국회나 언론 등 대외적으로 그 기관의 입장과 상황을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물론입니다. 공공부문의 경우 정책의 파급력이 국민생활에 미치는 범위가 크므로 보고의 과정을 거치며 여러 측면에서 검토와 검증이 이루어집니다.
실무에서 열심히 보고서를 작성했지만, 결과적으로 실무 검토내용대로 정책이 결정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위로 올라갈수록 보고를 받고 책임지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정보의 범위는 넓어지기 마련입니다. 실무 보고서의 내용 외에도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많을 수 있습니다. 종합적인 정보나 상황을 바탕으로 최종 결정이 이루어집니다. 결과만 두고서 "쓸데없는 일을 했네."라는 자괴감에 빠질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보고서의 내용은 결정에 앞서 분명 중요하게 고려된 요소 중에 하나일 테니까요.
그렇기에 보고서는 말하려는 바가 명확하고 논리적으로도 짜임새를 갖추는 것이 우선입니다. 실무에서는 1장 분량의 예쁜 보고서가 미덕이라는 인식도 있다고 합니다.(사실 이러한 인식은 요즈음에는 그다지 일반화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쟁점이 있고 고민이 필요한 중요 사안인 경우 1장 안에 담는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분량에 신경 쓴 나머지 과도하게 내용을 압축적으로 담는 경우 중요한 맥락이 생략되기 쉽고 논리적 흠결을 낳기도 합니다.
1장을 넘겨 2장 3장의 보고서가 되어도 논리적 완결성만 갖추고 있다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래야 이해도 쉽고 필요한 결정도 빠르게 할 수 있습니다. 내용 없이 예쁘기만 한 1장짜리 보고서는 반려의 대상이 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필요한 내용이 잘 채워져 있다면 '예쁜'보고서가 제 몫을 할 차례입니다. '예쁜'이라는 말의 의미는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편집이나 구성에 관한 부분이라면 그 '예쁜'은 완결성 있는 보고서를 백업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굳이, '형식이 내용을 압도한다'라는 말을 꺼내지 않더라도 적절한 수준의 예쁨은 보다 빠르고 정확한 이해를 돕는 방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인터넷 기사 중 공직을 떠난 어떤 분의 인터뷰 기사내용 중 '공직사회가 1장짜리 예쁜 보고서를 만드는 형식주의에 매몰되어 있다.'는 취지의 내용을 보고 다시 보고를 생각하며 가볍게 키보드를 두드려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