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락을 피하는 보고서를 위해
벌써 전설과 같은 이야기가 돼버렸습니다. 제가 공직에 들어오기 위해 치러야 했던 시험은 1차는 객관식, 2차는 주관식 논술, 3차는 토론을 포함하는 면접으로 구성됐습니다.
1차와 2차만 놓고 보자면 2차 논술시험의 난이도와 부담감이 훨씬 컸습니다. 경제학, 행정법, 정치학 등 각 과목별로 2시간 동안 A4용지 크기의 답안지 10장을 채워야 했습니다.
정신없이 답안지를 써 내려가다 문득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보았을 때, 종료까지 채 5분이 남지 않았던 그 아찔한 순간이 아직 생생합니다.
2차 논술시험에서는 출제자가 묻는 질문에 얼마나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답하느냐가 득점의 높고 낮음을 결정합니다. 문제를 통해 묻는 바와 관계없는 엉뚱한 답을 써내는 경우를 '논점일탈'이란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열심히 답안지를 써냈지만 합격의 문턱을 넘지 못했을 땐 바로 이 '논점일탈'이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회사에 들어와 보니, '논점일탈'은 비단 고시 2차 시험에서 뿐만 아니라 보고서를 작성할 때도 의미 있게 생각해야 하는 말이었습니다. 상급자로부터 지시받은 검토주제, 업무담당자로서 작성하려는 보고서의 제목은 출제자가 제시한 문제에 해당합니다. 출제자의 요구와 의도에 맞게 문제를 풀어내야 하듯, 보고서도 그에 맞춰 작성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보고서는 과락으로 향하는 답안지처럼, '써먹을 데 없는' 보고서가 됩니다.
이처럼 작성하려는 보고서의 제목에 맞게 내용이 구성되고 채워져야 하는 것이 정석이지만, 적지 않은 경우에 제시된 제목의 범주를 넘어서는 내용으로 보고서가 채워지기도 합니다.
가령 'ㅇㅇㅇ 재원활용방안 검토'라는 제목으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경우라면, ㅇㅇㅇ재원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활용할지에 집중해서 작성해야 합니다. 보고서에 '재원 확보방안' 같은 다른 논점이 섞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덧붙이는 예로, 'ㅇㅇ법률의 적용을 받는 '주민'의 범위 '를 주제로 검토 보고서를 작성한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대략적인 보고서의 흐름은 아래와 같을 겁니다.
- 문제가 되는 상황은 이러이러하다.
- 주민등록법 등 관련법에서는 주민의 범위를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 현행 ㅇㅇ법에서는 주민의 범위를 별도로 규정하고 있지 않아,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다른 법률상 개념을 적용할 필요가 있다.
- 해당 개념 적용 시, ㅇㅇ 법상 주민의 범위는 이러이러하다.
그런데, 이러한 흐름에서 주제와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는 ' 미국 사례 검토'를 포함시키게 되면 논점을 일탈하게 됩니다
칼 끝이 흔들리지 않아야 목표에 제대로 다가갈 수 있습니다.
보고서를 작성자 본인의 입장에서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보세요. 출제자의 의도에 맞게 문제를 풀고 있는지 중간중간 한 번씩 점검해 가며 작성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