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살기 위해 행복해져야만 했다
여느 직장인들이 그렇듯 일요일 밤이면 생각이 많아진다.
또 끔찍한 월요일의 시작이구나. 일주일을 잘 버텨낼 수 있을까. 버티고 버텨서 금요일을 맞이하면 또 주말이 의미없이 지나가고 끔찍한 월요일이 돌아오겠지.
나는 일주일을 살아간다. 일생도, 일년도, 한달도 아닌 일주일이 내 삶에 존재하는 유일한 시간감각인 것처럼 살아간다. 아마 당신 또한 그럴 것이다. 그러다 문득 연말이니 생일이니 하는 특별한 이벤트가 있을 때 깨달을 것이다. 1년이 지났구나. 그리고 서른, 어쩌면 마흔 즈음에 깨닫겠지. 세상에. 10년이 지났구나. 나에겐 여전히 일주일이 지났을 뿐인데.
인생이 이렇게 일주일 뿐인 삶으로 끝나버리는 것 아닐까. 덜컥 겁이 나 쉬이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월요일 출근이 야차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지고 금요일이면 비로소 숨통이 트이는 삶. 그걸 몇백번이고 반복해야 하는 미래. 희망이란 있는 걸까. 빛은 있는 걸까. 구원이라는 건 있는 걸까, 정말.
사는 게 이런 게 아닐텐데.
분명 행복은 어딘가에 존재할텐데 찾을 수가 없다. 어쩌면 그건 찾는답시고 찾아지는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짧은 인생 돌이켜보면 행복했던 순간들은 덜컥 찾아오곤 했다. 딱히 행복해지고 싶어서 노력하거나 행복을 찾기 위해 탐색했던 게 아닌데 어느 순간 내 일상으로 들어와 있었다.
행복한 시기의 나는 비로소 일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곤 했다. 일주일이 아니라 한달 단위의 계획을 세웠다. 연단위의 목표를 세웠다. 일생을 위한 청사진을 그렸다. 행복한 나는 일주일 그 이상의 사람이었다. 월요일이나 금요일 따위는 내 기분의 키워드가 되지 않았다.
행복한 나는 그러니까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던 거다. 다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무저갱 속을 헤매는 내 삶을 구출해내고 싶었다. 그래서 실체가 없는 것을 찾아나섰다. 행복을 찾아. 구원을 찾아.
언제부턴가 습관처럼 되뇌이던 말이 있었다. '음식은 나를 구원할 수 없다. 술도 나를 구원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운동을 시작해봤다.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거울 속 바뀌어가는 내 모습을 보며, 쇼핑을 가서 작년보다 두 사이즈 작은 옷을 고르며, 이전보다는 좀 더 행복한 인간이 되어간다고 느꼈다.
착각이었다. 나는 여전히 헬스장을 가야하는 월요일이 두려웠으며 푹 쉴 수 있는 주말만을 기다렸다. 이전보다 나은 인간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더 나아지지 못함을 자책했다. 왜 더 열심히 운동하지 못했어? 왜 먹는 걸 더 참지 못했어? 왜 더 날씬해지지 못하는 거야? 다음주에는 이번 주보다 더 잘 할 수 있겠지?
결국 나는 일주일짜리 인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번 주보다 덜 실패한 다음 주를 위해 살아가고 있었고 그 한 주 한 주가 모여 완성되어야 할 궁극적인 목표가 없었다. 거시적인 관점을 가지지 못하니 순간에만 집중하게 됐고, 찰나를 구원하기에 운동과 다이어트는 너무 장기적인 프로젝트였다.
나는 또 다시 음식과 술로 구원을 갈구하기 시작했다. 주말이면 어김없이 폭식과 폭음을 하며 1분 1초를 행복하게 보냈다. 8, 9시간 정도를 지독한 포만감 속에 우울하게 보낸 다음 배가 꺼지면 다시 1분이라도 행복하기 위해 먹고 마시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먹으면서도 속으로 뇌까렸다. '음식과 술은 나를 구원할 수 없어. 이건 그냥 잠깐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행동이야.'
그럼 도대체 무엇이 나를 구원할 수 있단 말인가?
모자이크처럼 시간을 이어붙이는 지긋지긋한 일주일짜리 인생. 1년 넘게 고착화된 이 굴레를 끝내려면 어줍잖은 시도로는 안된다는 걸 깨달았다. 뫼비우스의 띠는 가위로 자르지 않는 한 영원히 계속된다. 내 인생에도 가위가 필요했다.
하루짜리 인생을 살았던 적도 있다. 죽지 않는 것에 집중하며 하루를 버텨내고 나면 밤마다 덮쳐오는 자괴감과 공포에 맞서 싸워야 했다. 약의 힘을 빌려 겨우 잠에 들고 다시 아침에 일어나면 욕부터 나왔다. 아 씨발, 또 눈을 떴어. 오늘도 안 죽고 살아내야 해. 그렇게 읊조리고 방금 욕짓거리가 튀어나온 배알 속으로 찬물과 알약 몇개를 털어넣었다. 안 죽기 위한 최소한의 발버둥이었다.
세상은 내게 가혹하기만 했고 집 밖으로 한 발작 나가는 것 조차 도전이었다. 스치는 살랑바람마저 날 공격하는 듯 했고 매분매초는 지지 않으려 애쓰는 싸움의 순간이었다. 삶이란 몇백년 동안 풀리지 않는 난제를 들이밀며 당장 답을 내놓으라 재촉하는 시험인 것처럼 느껴졌다.
죽을 순 없으니 꾸역꾸역 살아냈다. 하루가 끝남과 동시에 내 인생도 매일 끝이 나곤 했다. 밤마다 수면제의 도움을 빌려 리셋버튼을 누르면 아침에 똑같이 눈을 뜨고 또 똑같이 욕을 하곤 했다. 아 씨발, 또 눈을 떴어. 그리고 똑같은 하루짜리 인생을 반복했다.
리셋 버튼을 누르다 에러가 나서 인생이 그대로 종료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매일 밤 같은 생각을 했지만 한번도 에러가 뜬 적 없이 내 인생이라는 게임은 아침마다 새로 시작됐다. 지옥같은 나날들이었다. 그 때는 그냥 내 인생이 이렇게 끝나버릴까봐 두려웠다. 영원히 나아지지 않으리란 공포감에 진저리 치며 일어나 한밤중에 엉엉 울곤 했다.
그 때에 비하면 지금은 얼마나 행복한가. 적어도 나에겐 주말이 있다. 일주일이라는 짧은 목표가 있다. 하지만 행복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다. 남의 불행에 빗대어 내 행복의 크기를 가늠하면 안되는 것처럼, 내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 행복을 취해서도 안된다. 그건 빌어먹을 자기위로 그 이상도 이하도 되지 못하니까.
과거보다 얼만큼 행복해졌든 지금의 나는 충분히 행복하지 않다. 나는 더 행복하고 싶다. 한달짜리 인생을 살고 싶다. 일년짜리 인생을 살고 싶다. 일생을 살고 싶다. 행복할 수록 더 욕심이 생긴다.
행복해지고 싶다는 욕망은 가슴이 아닌 뱃 속 깊은 곳에서부터 똬리를 틀고 서서히 자라났다. 똬리의 끝이 이젠 명치까지 도달해 이 욕망을 처리하지 못하면 더 이상 숨을 쉬지 못할 지경이다. 이젠 행복해져야만 한다. 행복하게 살고 싶은 게 아니라, 살기 위해 행복해져야만 한다.
오랜 세월 시체같던 몸 위로 차곡차곡 쌓인 응어리들을 헤집고 나는 팔을 뻗어 가위를 찾았다. 가위를 찾은 후에도 망설임이 깊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또 몇달을 일주일인 것처럼 흘려보냈다. 하지만 이제야말로 가위를 들어야 한다. 가위를 쥔 손에 마지막 의지를 짜내어 힘을 줄 것이다.
이젠 뫼비우스의 띠를 끊어보려 한다.
이젠, 일생을 살아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