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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루무비 Dec 08. 2021

잃어버린 영화를 찾아서

1. 대방동, 아빠의 노트북과 무협영화

  나의 가장 오래된 영화의 조각은 중국 무협 영화의 형태를 하고 있다. 서울로 올라온 뒤 내가 여섯살이 될 때까지 우리 가족은 동작구 신대방동에 살았다. 아빠는 휴일이면 종종 노트북으로 영화를 보여줬다. 그렇게 본 영상들은 배추도사 무도사가 등장하는 <옛날 옛적에> 시리즈나 디즈니 영화 같은 애니메이션이 대부분이었지만, 지금까지도 마음 속에 강렬하게 남아 있는 이미지들은 오히려 아빠 몫으로 빌려온 무협영화에서 발견한 것들이었다. 스토리나 인물들에 대한 것은 거의 기억나지 않지만 칼을 휘두르며 싸우고 있음에도 춤을 추듯 우아한 동작들과 그런 몸짓에 서린 어떤 처연함 같은 것들이 어린 나이에도 분명하게 와닿았다. 속도의 완급조절이나 색감 그리고 음악과의 조화 같은 것들이 그런 인상을 만들었겠구나, 하는 것은 나중에 깨달았지만 그런 의식 없이도 영화는 충분히 아름다웠다.

  아빠는 지금도 만 원짜리 무협영화를 과감하게 결제해서 볼 정도로 일관된 취향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영향 속에서 나도 알게 모르게 많은 무협영화들을 보았다. 하지만 여섯 살 무렵 대방동 집에 배를 깔고 누워 아빠와 함께 보았던 영화의 제목을 정확히 기억해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얼마 전까지도 그 영화들은 틀림없이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 아니면 장예모 감독의 <영웅>이나 <인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 따져보니 이 영화들은 전부 2000년대에 나온 영화이니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 장국영 주연의 <천녀유혼>과 애니메이션 <천녀유혼>을 본 기억은 확실하지만 그보단 좀 더 선명한 무협 액션을 봤던 것 같다. 그렇다면 내 영화적 기억의 원형을 이루는 데 일조한 작품은 도대체 뭐였을까? 아빠에게 물어봐도 비슷비슷한 제목만 반복됐다. 그러던 중 불현듯 머릿속을 스쳐지나간 작품은 <동방불패>. 혹시 <동방불패> 였을까? 별안간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 <동방불패>를 보기로 했다.


  92년에 나온 영화이니 벌써 서른 살이 넘었다. (내 나이와 얼추 비슷하다.)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몇몇 장면이 촌스럽고 유치한 감은 분명히 있었지만 무술 액션만은 지금의 눈으로 봐도 여전히 화려했다. 특히 상문천과 영호충이 오래간만에 대면해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대결하는 장면이나 동방불패가 임아행의 부하들을 모두 제거하기로 마음 먹었을 때 남봉황, 악영산(a.k.a. 악사제), 임영영, 상문천 등이 동방불패 패거리와 연달아 싸우는 장면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동방불패>에 등장하는 여러 전투 장면들은 단순히 화려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각 인물을 잘 반영하고 있어서 좋았다. 소오강호의 이야기를 잘 몰라도 각 인물이 싸우는 방식을 통해 그의 특기나 무술 실력뿐 아니라 인물의 성격과 그들 간의 관계까지 어느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사실 영화를 보다보니 내가 전에 영화를 봤던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대부분이 처음 본 것처럼 새로웠다. 다만, 임청하 배우가 연기한 동방불패의 강렬한 이미지만은 또렷하게 기억이 났다. 물론 그의 가공할 만한 내공도 새삼 다시 한 번 놀라웠지만 이제 와서 보니 그가 영호충과 맺는 관계의 방식에 더 눈길이 갔다. 규화보전을 익히고 있다는 이유로 임아행에 제거당할 뻔한 동방불패나 가장 믿던 사람들에게 배신당한 경험이 있는 임아행 등은 모두 사람을 믿지 않는다. 다만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잠시 힘을 합치거나 다시 등을 돌리는 임시적 관계가 있을 뿐이다. 그런 동방불패는 물가에서 영호충과 짧은 만남을 가지고 진실한 관계의 가능성에 대해 일말의 기대를 갖게 된다. 필요가 없으면 가차없이 사람을 산산조각 내버릴 수 있는 힘을 가진 동방불패는 영호충과의 싸움 중에 몇 번이나 공격을 거둬들인다. 그리고 마지막까지도 그가 살기를 바란다.

  처음에는 그저 영호충을 농락하고, 자신을 배신하려  씨씨에게 벌을 주기 위해  둘이 잠자리를 갖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나니 어쩌면 동방불패는 진심으로 영호충과의 깊은 관계를 원했던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자신은 그와 관계를 맺을  없기에 대신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씨씨를 들여보냈는지도. 후에 동방불패가 규화보전을 익히는 도중 여성의 모습을 하게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영호충은 해당 사실을 속인 것에 대해 분노하는 대신 그날 자신과 하룻밤을 같이 보낸  동방불패 자신이 맞는지를 연거푸 묻는다.  대답을 듣기 위해  역시 동방불패가 죽지 않기를 바란다. 동방불패가 조금만  빨리 영호충을 만났다면 그는 다른 삶을 살았을까. 영화를  보고나니 내가 기억하고 있던 동방불패의 얼굴은 생각보다도  슬픈 표정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어느 휴일, 대방동 집에서 아빠 노트북으로 보았던 무협 영화가 <동방불패>였던가.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다만 내 영화적 기억 속 한 서랍에는 무협 영화의 라벨이 붙어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얼마전 <샹치>를 보러가서 양조위와 양자경의 액션을 커다란 스크린으로 보니 어찌나 가슴이 두근거리던지. <일대종사>의 엽문의 액션을 사랑하는 나에겐 너무 큰 선물이었다. 이들이 더 많은 영화를 찍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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