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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루무비 Jul 25. 2022

[영화쓰담] 7월 느린영화제 후기

디아스포라영화제 - 경계를 넘는 여인들

  영화로 글을 쓰고 이야기를 나누며 위로를 주고받는 공동체를 꿈꾸는 영화쓰담은 올해 느린영화제라는 이름으로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당해 영화제 시즌이 끝나면 관객들과 서로 만나기 쉽지 않은 단편 작품들을 1년 늦게나마 같이 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한 것이다. 물론 최근에는 전국에 있는 다양한 영화제뿐 아니라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단편 영화들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공동체 상영이나 여러 가지 기획전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편영화가 더 많은 공간에서 상영되고 감독과 관객이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여전히 의미 있는 일이다. 이에 영화쓰담에서는 올 하반기까지 계속해서 느린영화제라는 이름 아래 작년 영화제에서 상영되었던 작품들과의 뒤늦은 만남을 계속해보려고 한다. 이번 달 느린영화제의 주제는 디아스포라영화제였다. 제9회 디아스포라영화제에서 폐막작으로 상영되었고 관객상을 수상한 두 작품, <고마운 사람>과 <여인과 사자>를 우선 상영작으로 선정하였다. 그리고 최근까지도 서울여성독립영화제, 청주국제단편영화제 등에서 꾸준히 초청을 받고 있는 <지나친 하루>도 함께 상영하였다. 행사 당일에는 <여인과 사자>를 연출한 박유진 감독, <지나친 하루>를 연출한 조단양 감독을 모시고 이야기를 나눴다. 각 영화에 대한 짧은 감상으로 상영회 후기를 대신하고자 한다.


*본 행사는 청신호 명동의 청년 커뮤니티 지원과 인디그라운드의 공동체 상영 지원을 받아 배급사 호우주의보와 센트럴파크에 공동체 상영 비용을 지급한 후 진행되었습니다.



<고마운 사람> (이경호·허지은, 2020)


호우주의보 rainydays pictures 제공


  살기 위해, 영위하고 있는 삶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나를 감춰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는 상상 속에서도 쉽게 허락되지 않고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외면당한다. 그런 이들을 생각할 때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는 백석의 시구는 정말이지 가슴에 사무칠 정도로 아리다.  

  반면에 자기가 원할 때면 언제든, 남의 말을 잘라먹어서라도, 하고 싶은 얘기를 하고 싶은 만큼 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모든 공적 공간을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아주 작은 광장도 내어주지 않으려 하고 상상의 세계마저 철저하게 통제하고 싶어 한다. 자신이 장악한 세계 안에 소수자 정체성을 가진 이가 존재할 거라는 의심조차 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당당하게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이들을 차별한다.

  극의 초반부터 관객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던 아저씨 수강생은 진아가 수업을 진행하느라 참여하지 못한 퀴어축제에 가서 축제 참가자들을 비난하는 영상을 촬영한다. 퀴어축제에 참가한 이들을 향해 지옥불 속에서도 저렇게 춤출 수 있겠냐고 묻는 아저씨 수강생은 진아가 퀴어 당사자일 수 있음은 고려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자기 마음대로 진아의 이름을 ‘고마운 사람’ 크레딧에 포함시킨다.

  아무 말 없이 ‘싫어요’ 버튼을 누를 뿐인 진아의 대처가 아쉽긴 하지만 해당 센터에서 다음 수업도 맡아야 하는 진아의 현실을 생각하면 나 역시 별다른 대안은 없다. 역시나 우리에게는 상상도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고마운 사람이라는 제목의 의미가 너무 아프게 다가오는 작품이지만 진아와 엄마의 관계에서 작은 희망도 갖게된다. 딸이 정성스럽게 만든 팔찌를 조용히 차보며 구슬마다 같이 엮인 딸의 간절함을 어루만지는 엄마의 모습이 영화가 다 끝나고 나서 오래 마음에 남는다.



<여인과 사자> (박유진, 2021)


센트럴파크 centralpark films 제공


  <여인과 사자>의 여인은 자신에게 정해진 자리에서 벗어나길 택했다. 그래서 여인은 가족이라는 경계를 넘고 국경을 건너 외국으로 떠났다. 그러나 외국으로 간 여인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적응하기 위해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영화는 굳이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슬은 자신이 사자로 등장하는 태몽에 대해서 얘기한다. 자신의 탄생을 예고하는 꿈이지만 정작 슬은 그 꿈을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슬은 그 꿈을 기억한다. 슬이 기억하는 초원에서 여인은 단호한 주먹 한 방으로 사자를 때려눕힌다. 그러나 여인이 꿨다는 실제 꿈의 내용은 이와 좀 다르다. 여인은 한참동안 사자를 마주보고 선 채로 두려움에 떨었다. 총을 놓치지 않기 위해 몇 번씩이나 손에 흥건하게 고인 땀을 바지에 닦았다. 그러다 사자가 다가오는 바람에 엉겁결에 방아쇠를 당기고 말았다.

  제멋대로인 것 같은 여인의 삶은 실은 이처럼 두려운 마주서기의 과정을 수반했을 것이다. 여인은 자신의 여인(엄마)과의 관계에 묶인 매듭을 끝내 풀어내지 못했고 죽음 이후 일기로 남은 자신의 여인과 뒤늦게 내밀한 대화를 시도한다. 슬은 그보다 일찍 여인을 마주본다.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까지 망설인다. 그러나 슬은 이내 총을 내려놓고 다만 여인의 금빛 머리칼을 쓰다듬는다. 가보지 못한 이국의 땅처럼, 그리고 초원의 사자처럼 매력적이면서 동시에 두려운 존재, 여인. 슬은 그를 향해 아주 천천히 거리를 좁혀 다가간다.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도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인물을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은, 언급되지 않는 지난한 세월을 온 몸으로 전달하는 오민애, 류이재 두 배우의 표현력 덕분이었을 것이다. 거기에 다양한 질감과 색감으로 전달되며 후광처럼 인물을 감싸는 형형색색의 천도 한몫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지나친 하루> (조단양, 2021)


센트럴파크 centralpark films 제공


  집주인은 예정된 날짜보다 하루 일찍 집을 비워주길 부탁하고 사장님은 급여일을 하루 넘겨 월급을 보내준다.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하루들이지만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한정된 서우에게 그렇게 지나친 하루들은 그야말로 지나치다. 서우가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 보냈을 지난한 시간들에 대해서 영화는 애써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관객은 서우의 지친 얼굴과 만성적인 통증을 수반하는 손목 그리고 언제든 방어할 기세로 잔뜩 긴장하고 있는 몸을 통해 그가 어떤 하루들을 겪어왔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영화는 월이 달고 있는 교육중이라는 명찰을 한 때 서우 역시 달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월의 현재가 서우의 과거와 닮아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서우와 월은 중국의 국경을 넘어 한국에 온 젊은 여성이라는 점에서 이미 서로 닮았다. 어쩌면 월은 과거의 서우이고 서우는 미래의 월일지 모른다. 그러나 월은 머무르고 서우는 떠난다. 둘은 잠시 같은 하루를 공유하고 그 하루의 지나침을 분담하지만 며칠 전까지 일했던 직원임에도 ‘거기 있으면 안 되는’ 존재가 되어버린 서우는 머무를 수 있는 장소를 찾아 돌아간다. 그렇게 둘은 서로를 지나친다.

  마치 연극 무대처럼 한정된 공간에 여러 인물들이 드나드는데  짜인 대사와 현실감 있는 연기 덕분에 상황이 복잡하거나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적절하게 유지되는 긴장감은 관객으로 하여금 서우와 월의 지나친 하루에 끝까지 동행할  게 만든. 여러모로 연출의 세심한 고민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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