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2016년, 영화 감독이 될 거라는 누나 J와 둘이서 영화모임을 만들었다. 시 창작 수업에서 처음 만난 J와 나는 수업이 다 끝나고 뒷풀이 자리에서야 처음 통성명을 했다. 낯선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는 뚝딱거리거나 폭주해버리는 극단적인 성격의 나이지만 여태까지 몰랐다는 게 이상할 정도로 J와는 말이 잘 통했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우리는 당시 좋아하던 영화도 같았고(지금은 언급하기 곤란한 감독이 되어버린 소노 시온의 <두더지>(2011)), 무엇보다 생일도 똑같았다! 술기운이 완전히 달아나버릴 정도의 우연이었다. 그 뒤로 우리는 많은 영화를 같이 보았다. 홍대 상상마당에서 <무뢰한>(오승욱, 2014)과 <비포 선라이즈>(리처드 링클레이터, 1995)를, 서울극장에서 <무쉐뜨>(로베트 브레송, 1967)와 <자객 섭은낭>(허우샤오시엔, 2015)을 보았다. (한동안 <두더지>의 주연인 소메타니 쇼타에게 푹 빠졌던 우리는 신촌 아트레온에서 J필름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상영한 <모두가 초능력자>(소노시온, 2015)도 함께 보았다!) 자연스럽게 우리 대화의 주제는 항상 영화의 주변을 맴돌았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우리의 만남은 영화모임이 되었다.
J의 완전한 동의를 얻지는 못했지만 모임의 이름은 내가 제안한 ‘영화쓰담'으로 정해졌다. 영화를 보고 글도 쓰고 이야기도 나누고 그러면서 서로 위로를 주고 받자는 의도였다. (지금도 구글에 영화쓰담을 검색하면 당시에 파워포인트 도형으로 만든 처참한 수준의 로고를 찾을 수 있다.) 모임의 이름과 목표는 거창했지만, 우리가 만나서 나누는 영화 이야기들을 조금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지금도 어리지만, 그때는 더 어렸던 우리들이 나누는 이야기들 속에는 반짝거리는 단어와 이미 정리된 개념들에 귀속되지 않는 신선한 아이디어들이 넘쳐났다. 우리는 공식적으로는 세 번의 모임을 가졌고 열 편이 조금 안 되는 글을 남겼다. 일본영화 관련 수업을 진행하던 교수님을 모시고 인터뷰도 진행했다. 사람이 자기가 옛날에 쓴 글을 보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지 않으면 발전이 없는 거라는데 솔직히 그때 우리가 쓴 글들은 지금 봐도 재밌다. 무엇보다 솔직하다. 내가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가는 바람에 우리의 (공식적인) 모임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지만, 멋부리지 않고 솔직하게 영화에 대한 이야기와 글을 나눈 경험은 나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이후 나는 지속적으로 그런 장소를 갈망하게 되었다.
2017년, 나는 6개월이라는 짧은 미국 체험을 마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 J는 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입시를 치러 영화를 전공하는 학생이 되었고 나는 희곡 전공으로 대학원 진학을 꿈꾸는, 세상 무서운지 모르는 고학번 학부생이 되었다. 해가 바뀌었어도 우리는 생일 파티도 같이 챙기고 예전만큼은 아니어도 종종 만나서 영화 얘기를 나눴다.
그러다 우리는 어느 순간 멀어졌다. 서로의 입장이 다르겠지만 내딴에는 그동안 속상하던 마음이 터져나온 것이었다. 감정적으로 많이 힘들던 시기이기도 했다. 단단한 줄 알았던 마음이 한순간에 무너져버리는 바람에 어찌해야 할 줄 모르고 방황했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학교도 휴학했다. 얼마 뒤 부국제 기간에 부산에 내려간 나는 영화제에서 스태프로 일하고 있던 U에게 무작정 연락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U는 희곡론 수업에서 같이 만난 친구였는데, 같이 <이영녀>의 일부를 공연하며 급격하게 친해졌다.) 일종의 SOS였다. 너무나 고맙게도 U는 바쁜 시간을 내어 흔쾌히 나를 만나 긴 하소연을 들어줬다. 죽어가던 나를 U가 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8년, 다시 복학한 나는 영화모임을 다시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2015년 시 창작 수업을 같이 들을 때 신입생이었는데 어느새 4학년이 되어 심화수업을 같이 듣게된 Y, 여러 영화제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나의 구원자) U, 그리고 복수전공인 종교학 수업에서 만난 D, 세 명을 설득해 멤버를 꾸렸다. (U의 지인인 H도 함께했다.) 학교의 인문학술지원사업에 선정돼 최소한의 활동비와 도서구입비도 지원받게 되었다. 그레타 거윅, 이경미, 실비아 창, 가와세 나오미, 토드 헤인즈, 루카 구아다니노 등의 감독들 작품을 다루며 공식적으로 총 다섯 번의 모임을 가졌고 그해 부산국제영화제에도 같이 갔다. 다시금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모여 영화를 같이 보고 이야기와 글을 나누는 자리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그 뒤로 2019년과 2020년에도 새로운 멤버들과 모임을 하긴 했다. 그러나 당시 나에겐 경제적, 심적 여유가 전혀 없었다.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건 아니어도 나름 총명한 학생이라고 자부했던 나는 세기의 논문을 써내기는커녕 매주 대학원 수업을 따라가기도 벅차했다. 그런 주제에 편하게 모여 영화 이야기를 나누겠다는 건 그야말로 언감생심이었다. 나의 영화모임은 글과 위로가 모두 사라진 채 유명한 영화 보고 어려운 이야기 나누는 지식 배틀 아레나로 변질되었다. 영화모임을 하면 할수록 도리어 괴로움만 쌓였다. 게다가 고정된 멤버와 지속적으로 모임을 이어나가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슬슬 논문 준비도 해야했던 나는 이쯤에서 영화 모임을 마무리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마음이 힘들고 외로울수록 나는 더욱 강렬하게 ‘안전한 장소'를 갈망했다. 영화를 같이 보고, 느끼는 솔직한 감정을 말하고 쓸 수 있는, 그래도 괜찮은 안전한 장소. 그렇게 나는 (1년을 채 참지 못하고) 2021년 봄부터 다시 영화모임을 재개했다. 바로 모임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하긴 힘들지만,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써준 덕분에 모임의 기반이 단단해졌다. 21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참여하는 고정멤버도 생겼고, 상영회를 하고 감독들을 초청해 관객과의 대화도 진행할 정도로 행사의 규모도 커졌다. 상영회에 참석한 감독들이 모임이 참 편하다고, 그래서 이상하게 다른 곳에서는 말하지 않을 이야기까지 하게 된다고 할 때마다 뿌듯함을 감출 수가 없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모여서 편하게 자신의 감상을 나눌 수 있는 안전한 장소. 위로를 주고받을 수 있는 따뜻한 장소. 우여곡절 끝에 그런 장소를 만들어낸 것 같아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행복하다.
8년 차를 맞이하여 올해는 ‘기록하는 사람들'이라는 주제의 기획을 마련했다. 사람은 누구나 어떠한 형식으로든 기록을 남긴다. 유한한 나의 존재를 넘어서 지속하고 싶어서일까? 아니면 나의 고유한 체험을 남들과 나누고 싶어서? 이유야 어떻든 기록에 대한 욕망은 일종의 본능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기록을 통해 기억되고 증명되고 지속된다. 그렇다고 기록하는 일이 쉬운 건 또 아니다. 영화를 보고 리뷰를 쓰려고 해도 어떤 문장으로 시작해야 할지, 어떠한 형식으로 써야할지, 대상이 되는 영화와는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질문의 연속이다. 그래서 올해는 모임에 참여하는 사람들과 함께 이러한 질문들에 천천히 답해보려고 한다. 우리 모두 기록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영화를 보고 나의 체험을 솔직하게 남길 수 있도록, 해보려고 한다.
사실 우리 모임, ‘영화쓰담’은 이름이 명시하고 있듯 기록을 통해 완성된다. 기록이 없어도 우리의 시간들은 충분히 눈부시지만, 소중한 시간들이 그저 흩어져버리지 않도록 올 한 해 열심히 기록해보고자 한다. 이 서문은 올 한해 성실하게 기록하겠다는 선언이자, 약속이다. 그리고 아직 우리 모임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초대이기도 한다. 영화로 글을 쓰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안전한 장소를 꿈꾸는 모두를 초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