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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림 Feb 18. 2019

보일러가 꺼졌습니다.

선생님께 올리는 편지, 열하나

주말을 보내고 요가원에 들어서니 한기가 가득합니다. 보일러가 꺼져 14도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당장 오실 분들이 걱정되었습니다. 솔직히 하자면 그보다도 먼저 올라왔던 마음은 '탓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누가 보일러를 꺼서 이렇게 된 거지?'

'이건 나 때문이 아니야'


이 사건에 용의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제 마음속으로는 '잘한 사람'과 '잘못한 사람'을 구분하고 있었습니다. 상황에 대비해 결백을 주장하는 표정도 이미 준비가 되어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누가 잘한 사람이고 누가 잘못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실제로 당사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도 그만한 사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실수였다고 해도 저를 싫어해서 골탕 먹이려는 의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제 마음에서는 어떤 작용이 일어나서 순식간에 편 나누기를 해버렸을까요.


요즘에 들어서야 제가 어떤 방식으로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뜯어볼 여유가 생겼습니다.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이며 살았을 적에는 급류에 휩싸이며 사느라 물속에 뭐가 있는지, 이 급류의 근원은 어디인지 살필 겨를이 없었을 테지요. 돈을 포기하니 시간이 생기고 여백이 생깁니다.

그중 큰 힘으로 작동하는 것이 <남 탓>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제 생각과 행동에 정당함과 무고함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남을 탓하는 방법이 가장 쉬웠으니까요.




'내가 성격이 이렇게 된 것은 아빠 탓이야.'

'내가 지각한 것은 버스 기사가 늦장을 부리면서 운전을 해서야.'

'친구가 늦어서 내가 화가 났어.'


개중에 원인으로서 효력을 발휘하는 '남 탓'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몇 가지를 제외하고 나면 '남 탓'이 아닐까요? 정말로 화가 난 이유가 친구가 늦어서일까요? 원인과 결과가 곧바로 연결되어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요.'


쉬운 변명처럼 들리지만 진심이라면 사실이 됩니다. 그것에 대해 노발대발 화를 내거나 그 사람 탓을 하는 것은 더 필요한 쪽으로 보낼 수 있는 고귀한 물길을 고여 썩은 웅덩이에 충원하는 것과 비슷한 꼴입니다. 고이고 썩은 쪽은 깨끗한 물이 들어가도 같이 고이고 썩게 됩니다. 그쪽이 넘치면 다른 것들을 압도해버리기도 합니다.


남탓을 하는 생각의 습관은 당장은 나를 지켜주는 것 같지만 나중을 본다면 외로운 섬에 혼자 남는 길이지 않을까요. '나말고는 다 틀려먹었어.'라는 생각으로 번진다면 걷잡을 수 없을 테니까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하고 나온 사람이 거짓 진술한 사람을 눈물로 용서하는 일도 있습니다. 남은 삶을 분개하고 저주하며 보내는 길 말고 그때의 그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하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럴 자신까지는 없지만 일상의 작은 것부터 탓하는 마음보다 현재를 직시하고 껴안는 태도를 연습하겠습니다.


내일은 수도권에 눈이 많이 온다고 합니다.

제주에는 별 탈이 없길 바라겠습니다.




글 /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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