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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비 공주와 설사 왕자

by 람티


변비 공주와 설사 왕자가 만나 결혼을 했어요. 공주는 검은 점이 가득한 푹 익은 바나나를 먹어야 하고, 왕자는 푸르뎅뎅하고 단단한 바나나를 먹어야 했어요. 마트에 가면 둘은 어떤 바나나를 골라야 할지 몰라 난감했지요. 보통은 덜 익은 바나나를 사서 왕자가 먼저 먹고 공주는 익을 때까지 며칠을 기다렸어요. 왕자는 자꾸 공주를 약 올렸어요. 화장실에 갈 때마다 엉덩이를 흔들어대며 노래를 흥얼거렸죠. “공주는 끙끙 뿌지직! 나는 바로바로 푸지직!” 그 모습이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터지곤 했는데 왕자는 공주가 즐거워한다고 착각한 모양이에요. 더욱 신이 나서 툭 튀어나와 있는 공주의 아랫배를 쿡쿡 찔러대고는 했답니다. 같이 지내며 점점 왕자가 얄미워지는 날이 늘어났어요. 이 둘은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한 달 전에 결혼식을 치렀다. 서로를 남편이나 아내라고 부를 일이 있을 때면 ‘그래, 아직은 어색하지?’하고 눈빛을 교환한다. 신혼 중에서도 극극극초반이라 포장 비닐에도 담을 수 없는 따끈따끈한 소금빵 같다. 우리가 함께 보내는 하루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 주변에서 더 신이 났다. 만나는 사람마다 입꼬리가 올라가서는 신혼 생활에 대해 이것저것 묻는다.


“결혼하니까 좋아? 같이 있으면 뭐 해?”

“그냥 밥 해 먹고 치우고 산책하고 그러는 것 같은데.”

“둘이 취향이나 관심사 비슷하면 좋다고 하던데 그런 거 있어?”

“음... 음... 아니? 둘 다 사람 많은 곳 안 좋아하는 것 정도?”

“엥 그래도 어떻게 결혼할 생각까지 들었나 보네?”


그러게나 말이다. 탈탈 털어보아도 우리는 비슷한 점이 별로 없다. 나는 겁보라서 코미디나 멜로처럼 순한 맛 장르의 영화만 본다. 바닷가에 가면 얕은 물에서 튜브를 끼고 동동 떠있기만 해도 좋다. 신랑은 반대로 액션, 스릴러 장르를 좋아하고 다이빙이나 스킨스쿠버처럼 대담한 물놀이를 즐긴다. 내가 옥수수와 아몬드를 입에 달고 사는 할매 입맛이라면 신랑은 며칠이라도 치킨과 아이스크림을 거르면 눈밑이 퀭해지는 어린이 입맛이다. 시간별, 상황별로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 놓고 음악을 듣는 나와 달리 신랑은 음원차트 순위권 음악을 자동 재생해서 듣는다. 각자 잠시 쉬는 시간이 생기면 신랑은 이종격투기 영상을 보며 초코 아이스크림을 먹고 나는 연예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옥수수를 뜯는다.


장 컨디션조차 정반대다. 이십 년 경력의 프로 변비러인 나는 똥님을 모든 신 위에 모시며 산다. 똥님이 좋아하실 식사 메뉴 선정, 충분한 수분 섭취, 깔끔한 화장실 찾기를 생활의 우선순위로 둔다. 그래도 영 시원찮을 때가 많다. 신랑은 뭐만 들어가면 나온다. 심지어 식사 도중에도 종종 화장실을 들락날락한다. 내가 작은 일을 보는 빈도만큼 신랑은 큰 일을 보는 것 같다. 저렇게 자주 화장실을 가면 장이 만성 피로에 시달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 이렇게 다른 점이 술술 나오는 우리인데 평생 한 배를 타고 노를 저으며 살겠다는 결심을 해버렸다.


“근데, 둘이 어떻게 만났다고 했지?”

“제주도 게스트하우스에서. 여행 갔다가. “

“진짜 대박이야~ 쏘 로맨틱!"


여행 중에 하루를 함께 보낸 것뿐인데 행동파 신랑은 통영에서 춘천까지 다섯 시간이 넘는 거리를 달려 나를 만나러 왔다. 장거리 연애가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지, 취준비 중에 연애를 해도 될지 등의 현실적인 고민 속에 주춤하던 나와는 반대였다. 마음만 단단하면 못할 것도 없다는 신랑의 확신 가득한 말에 홀랑 넘어갔다. 우리는 어쩌면 달라서 시작할 수 있었다.


"왕자. 우리 크리스마스 때는 평소에 안 가던 특별한 식당 가볼까? 호텔 뷔페? 남산타워 레스토랑?"

"음 난 치킨 오마카세 먹어보고 싶은데~"

"그게 뭐야? 치킨 부위별로 코스요리 주는 거야?"

"응. 이태원 교촌치킨에서만 파는 특별 메뉴래!"


치킨 오마카세라니! 치킨 덕후들 사이에서 핫플인가 보다. 크리스마스 저녁은 난생처음 치킨 오마카세를 먹으며 보내게 될 것 같다. 내 인생 영화를 같이 볼 때면 신랑은 눈을 비비며 버티더니 잠에 지고 말았던 적이 많다. 신랑이 타고 싶던 제트 보트를 같이 타다가 나는 거의 기절할 뻔했다. 내가 변비로 고생할 때면 유산균 음료를 찾기 위해 함께 근처 편의점을 헤매고 신랑이 설사로 고생하면 죽을 종류 별로 배달시켜서 나눠먹는다. 상대방이 좋아하는 걸 함께하며 안 하던 짓을 해보느라 시간이 금방 간다.


"왕자는 암막 커튼 없는 숙소에서 잘 못 자던데 어젯밤에는 괜찮았어?"

"공주한테 오징어볶음 좀 짜지 않나? 다른 메뉴 하나 더 시킬까?"

"왕자, 당이 필요해 보이는데 후식으로 아이스크림 먹으러 갈까?"


암막 커튼이 없는 곳에서 아침잠을 설치는 신랑이 신경 쓰여서 다음 여행에는 안대를 준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심심한 간을 좋아하는 내가 오징어 볶음에 손을 잘 데지 않으면 신랑은 금방 눈치챈다. 신랑이 유독 기운이 없어 보이면 나는 초코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러 저녁 산책을 가자고 제안한다. 우리는 달라서 서로의 안녕을 자주 살피고 묻는다.


변비공주와 설사왕자는 아주 머나먼 왕국에서 살다 만났다. 이제 막 한 성에 살기 시작했으니 공주에게 당연한 것이 왕자에게는 아니기도 하고, 그 반대일 때도 있다. 그래도 서로 괜찮은지 자꾸 살피며 지내니 어찌어찌 잘 지나가려니 싶다. 투닥투닥은 적당히 하고 토닥토닥하며 지내봐야지. 변비공주도 설사왕자도 편안한 둘만의 왕국이라는 게 언젠가는 만들어지리라 믿으며. '공주와 왕자는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라는 뻔하고 평범한 결말을 써내려 갈 수 있길. 뿌지직! 푸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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