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 中 <지금 이 순간>
“내 결혼식 축가는 꼭 네가 해줬으면 좋겠어.”
같은 부서에서 동고동락했던 동료이자, 철없이 까불던 후배를 언제나 따뜻하게 감싸주고 격려해 주던 멘토, 그리고 늘 소녀 같은 어여쁜 모습으로 뭇 남성들의 흠모를 받던 선배의 진심 어린 부탁이었다.
그래서 비록 어떤 무대보다 떨리고 부담스러운 자리인 결혼식 축가였지만, 나는 흔쾌히 예스라고 답했다.
무슨 곡을 부를까, 이런저런 곡들을 물망에 올리던 끝에 결국 ‘지금 이 순간’을 부르기로 했다.
우리나라에 뮤지컬 열풍을 몰고 오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노래.
뮤지컬 배우는 물론, 수많은 남자 가수들이 무대에서 한 번쯤 불러봤거나 꼭 한 번 불러보고 싶어 하는 넘버.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Jekyll and Hyde)’의 대표 수록곡인 ‘지금 이 순간’(원제: This is the Moment)을 수식하는 표현은 그만큼 다양하고도 화려하다.
극 중 ‘헨리 지킬’이 간절히 바라던 꿈이 실현되기를 고대하며, 지금 이 순간이 의심할 여지 없이 인생 최고의 순간임을 역설하는 장면에서 부르는 곡이다.
뮤지컬을 보지 않은 사람들은 흔히 이 노래가 극의 클라이맥스에 등장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초·중반에 배치된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화려함과 그 이면에 숨겨진 어둠이 공존하는 무대, 서정적이면서도 극적인 멜로디 라인 위에 얹힌 프랭크 와일드혼의 이 곡은, 듣는 이와 부르는 이 모두에게 감동과 전율을 안겨준다.
극의 전체적 완성도보다는 이 한 곡이 지니는 상징적 의미가 훨씬 더 큰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런 까닭에 수많은 이들이 이 곡을 거쳐 갔다.
1997년 초대 지킬을 연기한 로버트 쿠치올리(Robert Cuccioli), 뮤지컬계의 모차르트라 불리는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페르소나 마이클 볼(Michael Ball), 호주가 배출한 글로벌 스타 앤소니 왈로우(Anthony Warlow). 국내에서는 ‘조지킬’이라는 별명을 얻은 조승우, 폭풍 가창력으로 무대를 압도하는 홍광호를 비롯해 김범수, 김연우 등 다른 장르의 가수들도 커버한 바 있다.
말하자면,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누군가는 이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것이다. 나 또한 이 곡에 잊지 못할 추억이 서려 있다. 그래서 수없이 많이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부를 때마다 설레고 가슴이 벅차오른다. 한 번도 대충 부른 적이 없을 만큼 애정이 깊고, 이제는 단순한 애창곡을 넘어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나에게 힘이 되어준 일종의 ‘주제가’ 같은 곡이다.
물론, 이 노래를 부른 뒤 지킬 박사의 최후를 떠올리면 모골이 송연해지긴 하지만 말이다.
“다음은 신랑 신부를 위한 축가 순서입니다.”
축가를 앞두고 혼자 앞줄에 앉아 있을 때면 늘 가슴이 쿵쾅거린다. 몇 번 경험했으니 이제는 좀 익숙해질 법도 한데, 이상하게도 한 번도 예외가 없다. 할 수 있는 건 생수를 홀짝이며 호명되기 직전까지 ‘지금, 지금’ 하며 첫 음을 잡는 것뿐.
짐짓 긴장하지 않은 척 힘차게 걸어나갔지만, 마이크를 받아든 손은 걷잡을 수 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신랑 신부를 바라봤다. 아마도 이 순간은 이 둘에게 어쩌면 평생 기억에 남을지도 모른다. 가슴이 다시 두근거렸다.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 말로는 뭐라 할 수 없는 이 순간…”
첫 소절을 간신히 마치고 신랑 신부와 눈이 마주친 그 순간, 등골로 소름이 돋았다. 두 사람의 눈빛엔 서로에 대한 확신과 행복이 가득했다.
그 둘의 앞날을 축복하는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사실에 내 떨리던 가슴은 이내 감격으로 젖어들었고, 그렇게 나는 또 하나의 잊지 못할 추억을 ‘지금 이 순간’에 새긴 채 무대를 내려올 수 있었다.
"음악을 왜 좋아하냐고?”
음악은 내게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잇는 장(場)이다.
작곡가와 연주자, 그리고 그 음악이 불러오는 기억 속에 자리한 그리운 얼굴들까지.
이렇게 아름다운 선율 위로 넘실대는 수많은 사람과의 교감은 내게 행복했던 시절의 무늬처럼 아로새겨진다.
때때로 아침에 들은 멜로디가 하루 종일 귓가에 맴도는 통에 조금 성가실 때도 있지만, 그래도 무미건조한 일상을 부드럽게 덮어주는 음악은 내 인생의 가장 큰 부분이다.
그래서 나는 음악과 함께한 시간에 감사하고, 앞으로 함께할 시간에 설렘을 느낀다.
지금 이 순간도. 여전히, 그리고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