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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후회를 허락하는 시간

by jd

누구나 '후회 없음'을 미덕으로 여긴다. 부끄러울 일이 없다는 것. 나쁜 구석이 없어 보이는 상태다. 그러나 동시에 비현실적인 일이기도 하다. 사소한 잘못 하나, 실수 하나 없이 지내기에는 세상이 그리 단조롭지 않다. 그 어딘가를 헤쳐가는 생활인으로서 요즘 부쩍 후회하는 일이 많다. 고속도로에서 길을 잘못 들어 약속 시간을 미루고, 중요한 소지품을 잊어버렸다가 바쁜 지인을 통해 건네받고, 재고가 없다는 책을 찾으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점 세 곳에 들렀다가 허탕을 쳤다. 그러잖아도 언짢은 마음에 자책까지 얹기에는 스스로 성미를 긁는 것 같아, 어느 순간 오히려 후회에 너그러워지기로 했다. 급기야 후회의 3가지 순기능을 발견했다.


첫째는 '더 나은 다음 선택을 위한 재료'이다. 확실히 페이지 모퉁이를 접듯, 기억 어딘가에 움튼 후회스러운 경험이 표식으로 새겨져야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꺼내볼 수 있다. 흔히 후회가 동반하는 안타까움, 부끄러움, 찜찜함 같은 불쾌한 감정이 없다면 나의 선택은 나아지지 못했을 거라 믿는다. 후회를 강박적으로 멀리하는 자세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는 태도를 앗아가고 있진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둘째는 '나의 성향을 드러내는 구체적 상황을 포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내가 후회하는 일은 주로 건망증과 관련이 있다. 구두와 정장 상의를 차 위에 올려두고 시동을 건 채 그대로 출발한 기억은 지금 돌이켜봐도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런데 후회하는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줄도 알아야겠다. 가만히 뜯어보면 이러한 실수는 사소한 일에 쓰는 에너지를 최소화하기 위해 최대한 생각을 비우고 눈앞의 일을 하는 습관에서 비롯됐다.


셋째는 '공감의 연결선'이다. 누군가의 공감을 사기 위해 부러 후회할 일을 만들 필요는 없을 것이다. 좋든 싫든 첫째 이유의 연장선에서 불편한 감정은 공감을 유도하기 마련이다. 회사에서 업무 대화 중 엔지니어의 문의에 대해 그들의 실수를 포착하면 "저도 했던 실수예요"라는 말을 전하려고 노력한다. 이 짧은 말로 대화가 한층 부드러워지고 소통이 편해지는 것을 느낀다.


날마다 자연스럽게 후회하며 나아가야 하겠다.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고 더없이 나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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