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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키 Jun 02. 2024

제발 돈 얘기 좀 그만해

돈 요구하는 부모와 적당한 선 유지하는 법

어떤 얘기부터 해야 할까 고민하다, 결국은 당연히 돈 얘기를 먼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대학 등록금을 낼 자신이 없어 입학통지표를 버리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보증금이 없어 고시원에 살면서 일을 구했지만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무늬만 성인이 구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여기저기 기웃거린 뒤에 다행히 숙식이 제공되는 놀이공원에 일을 구하게 되었다. 당시 시급은 3100원.

짧게는 9시간, 길게는 12시간을 넘게 아기자기한 유니폼과 돌처럼 딱딱한 구두를 신고 서있었다. 살면서 만나게 될 진상은 거기서 다 본 것 같다.


일을 시작한 지 한 달쯤 되었을 때, 어쩐 일인지 엄마가 전화를 걸어왔다. 짧은 통화를 하며 안부를 묻더니 곧 ‘이제 직장을 구했으니 매달 생활비를 보태’라고 했다. 당황스러울 만큼 당당하고 명랑한 그 목소리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 내 시급 3100원인데..?!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돈이 어딨냐고, 시급이 얼만지나 아냐고 소리를 쳤던 것도 같다.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면 얼마나 좋았을까.

시작이 어렵다고 했던가. 그 뒤로도 돈얘기는 지겹게 더 듣게 되었고



고졸의 학력으로 밥벌이가 녹록지 않다는 현실을 온몸으로 배운 뒤 고향으로 돌아왔다. 다시 수능을 치고 다행히 집 근처 국립대에 들어갈 수 있었다.

겨우 반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동안 모은 돈 200만 원을 엄마에게 주었다. 외할머니 병원비와 앞으로 내 생활비에 보태라는 의미였다.


나의 호의가 내 무덤을 파는 행위였을까? 전 재산을 다 주었는데도 엄마는 대학생인 내게 때때로 돈을 요구했다.

학자금 대출과 아르바이트로 대학생활을 이어가던 어느 날, 어린 동생이 전화를 걸었다.


- 언니, 엄마가 언니 주민번호 뭐냐고 물어보는데?


순간 등골이 서늘했다.

수시로 대부업체에서 돈을 빌렸던 엄마의 전적이 떠오르며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순식간에 이해가 됐기 때문이다. 생각할 틈도 없이 전화를 걸어 소리를 질렀다.

- 내 이름으로 대출받으려고 했냐, 진짜 죽어버릴 거다, 내 이름으로 이상한 짓 할 생각 말고 동생 이름으로도 뭐 할 생각 하지 마라.

더 심한 욕도 했었던 것 같은데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이미 전화는 대답 없이 끊긴 뒤였다.



뒤늦게 대학을 졸업해 경기도에 직장을 구했다. 보증금 300만 원도 없어 고시원에서 옷 두 벌을 돌려 입어 가며 출근하던 때였다. 평생 남쪽에서 나고 자란 내게 수도권의 겨울은 아플 만큼 추웠다.

입사한 지 두 달쯤 됐을 때였을까. 엄마에게 전화를 받았다. 직장도 구했으니 내 이름으로 본인의 새 차를 한대 뽑아달라는.. 새 차라니…

회사 탕비실에서 전화를 받아 소리도 지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았더니 뒷목이 욱신하고 숨이 막혀왔다. 목소리를 억누르며 대답했다.

- 앞으로도 계속 돈 얘기만 할 거면 전화하지 마. 두 번 다시 전화하지 마.

표정이 굳은 나를 본 직장 선배가 자초지종을 듣고 그냥 전화받지 말고 돈 보내지 말라고 내 편을 들어주었다.



지난날동안 많고 많았던 엄마의 돈 요구는 그 횟수만큼 이유도 참으로 다양했다.

곗돈이 없어서, 차가 고장 나서, 친구에게 빌린 돈을 갚아야 해서, 여행 가야 해서, 친척들하고 놀러 가려고, 내가 낳아줬으니까 니 생일 기념으로, 결혼할 거면 키워준 은혜에 보답해야 하니까 기타 등등. 그중에서도 제일 어이없었던 이유는 자신의 친구가 돈이 급하다는 이유였다. 알고 보니 그건 자기가 돈을 빌리려는 거짓말이었지만.


이런 이유로 엄마로부터 전화가 올 때면 기대와 실망, 분노와 죄책감으로 기분이 뒤죽박죽이 되었다. 오랜만에 건 전화가 나의 안부를 묻기 위함이 아니라 돈 요구라는 것도 속상한데, 그보다 더 나를 비참하게 했던 건 부탁을 거절한 뒤면 어김없이 돌아오던 비난이었다.

내가 딸한테 이런 말도 못 하냐

넌 어떻게 살길래 그 정도 돈도 없냐

회사 다닌다는 애가 돈 30만 원도 없냐

주기 싫으면 안 주면 그만이지 왜 난리부르스냐

..

덕분에 시답잖은 소리를 하고 ‘말도 못 하냐’는 변명을 하는 사람들을 나는 제일 경멸하게 되었다.  


잘못한 건 내가 아닌데, 엄마로부터 전화가 올 때마다 희미한 기대감에 들뜨는 내 자신이 미웠다. 그렇게 당하고도 또 뭘 기대했냐는 비난이 내 마음속 어디선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죽었다 생각하고 인연을 끊고 싶었다. 하지만 확신이 필요했다. 이 사회가 심어놓은 불효자식이라는 비난에 내가 떳떳하게 ‘난 할 만큼 했다’고 소리칠 수 있으리란 확신.

상담사에게 아직 확신이 안 선다고 했다. 한 때는 엄마가 죽기 전에 내가 받은 상처를 낱낱이 따지고 싶었는데 인연을 끊으면 그런 기회마저 없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했다.


상담사의 답은 오히려 간단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내겐 늘 선택지가 있다고 말했다. 인연을 끊고 싶다면 그래도 된다고. 누가 나를 비난해도 그 사람들은 내 사정을 모르기 때문에 중요한 게 아니다. 하지만 모든 선택에는 결과가 따르기 때문에 내가 그 결과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지 잘 생각해 보라고 했다.


마흔이 다되어가는 지금도 나는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해 갈팡질팡 하고 있다.

어떤 날은 엄마의 연락에 순순히 답을 했다가 또 어떤 날은 꼴도 보기 싫어 번호를 차단하고 남인 듯 지냈다.

하지만 다행인 건 고민하는 그 과정에서 조금씩 선명해지는 나만의 바운더리(경계선)가 생겼다는 것이다.


이제는 돈 얘기가 나오면 화도 내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린다. 대화할 의지가 없음을 확실히 전달하기 위함이다.

다만 일 년에 한두 번 정도는 동생들과 품앗이로 어느 정도 용돈을 보낸다. 이것도 하기 싫었지만 엄마를 위해서가 아니라 부담을 다 안고 가야 하는 동생들을 위한 배려다.(열받을 땐 이 것도 안 한다.)


앞으로 무례한 말로 나에게 상처를 줄 때는 대응하지 않기로 했다. 가족들이 다 같이 밥을 먹더라도 비난의 말이 들리면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기로 했다.


누군가 상처를 줄 때는 그 상황을 벗어나야 해요. 자기 자신부터 지켜야죠.


상담사의 말을 되새기면서 다음엔 해낼 수 있기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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