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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키 Aug 27. 2022

돈은 빌려줄 수 없어.

동생 B가 전화를 걸었다. 고조된 듯한 목소리로 본론부터 꺼내겠다며 말했다. 

- 엄마한테 받은 2천만원, 나한테 빌려줄 수 있을까.



2천만원의 사연부터 써야겠지. 

나의 어머니 K여사는 남들이 흔히 생각하는 보통의 '엄마'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가까운 친구가 결혼할 때, 다리를 곧게 펴지 못해 몸이 불편한 어머니께서 아끼며 모은 천만원을 결혼 자금으로 주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친구가 '너희 엄마도 너 결혼할 때 주려고 돈 모으고 있을 걸'이라고 말했을때 부정할 의지조차 없었을 만큼 나는 평생 어머니의 역할을 기대하지 않고 살았다.

대단히 잘못한 것 같진 않지만 잘못이 없는 것 같지 않은 나의 어머니, K여사.

그런 그녀가 내가 결혼을 하겠다고 하니 뭘 하든 보태라며 2천만원을 주었다. 결혼식도 없이 혼인신고만 했는데.


받고 싶었지만 받고 싶지 않았다. 

돈 2천만원은 절실했지만, 이제껏 낳아준 감사 표시를 하라며 내 생일에도 돈을 요구하는 어미가 주는 돈을 쉽게 받을 수는 없었다. 낳아준 보답으로 요구한 자질구레한 돈들을 합쳐도 2천만원은 안되겠지만, 이 돈을 받으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러야 할지가 무서웠다. 무엇보다 돈 2천만원으로 지금까지의 모든 과오를 퉁치려는 것 같아 받고 싶지 않았다.

몇 차례의 거절 끝에, 결국은 계좌로 들어온 돈을 받았다. 독이든 성배라며 형제들과 쓴 웃음을 짓긴 했지만, K여사가 가지고 있다가 또 사기를 당하거나 허튼 계획을 꾸미다 날려먹고 빚더미에 앉은 모습을 보는 것보단 비상금 2천만원을 자식이 쥐고 있는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돈을 받아 예금으로 묶어 두었다. 나는 이 돈을 내 결혼자금으로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고 손대지 않을 것이다. 필요하면 자식들한테 돈 달라는 소리 하지말고 이 돈 도로 가져가시라-는 말과 함께.


그리고 동생 B.

B는 K여사에게 단단히 화가 났다. 돈돈돈 거리는 게 지겨워 제발 돈 얘기 좀 그만하라는 호소에 K여사가 '가족끼리 이런 말도 못하냐'는 말에 그동안 참았던 둑이 터졌다. 누구에게도 돈을 빌린 적이 없는 B였다. 대학교도 가지 않고 가족 중 어느 누구보다 일찍 경제활동에 뛰어 들었던 B. 어린 나이에 밤잠 아껴가며 일을 했고 4대보험도 없이 일하며 힘들게 모은 돈을 모두 모친에게 주었다. 어리석게도. 

가족의 돈 요구를 들어주면 안된다고 몇 번이나 당부했었지만, 마음 여린 B는 어린 시절 나만큼 독하지 못했다. 자동차 할부금을 못 내서, 대출 이자를 못 내서, 친구에게 빌린 돈을 갚지 못해서, 생활비가 없어서. 오만가지 이유로 K여사는 자식들에게 손을 벌렸다. 최대의 희생양은 나만큼 독하지 못한 B였다.

10년을 참았으니 B도 한계가 왔을까. K여사가 몇 푼 안되는 돈으로 생색을 내자 폭발했다. 그리고는 K의 이름으로 된 집을 떠나겠노라고 선언했다.


오늘의 통화는 거기서 부터 시작되었다.

B는 꾸준히 자신만의 공간을 구하겠다고 했지만, 아무리 아끼고 애써도 전세집도 구하기 힘든 대한민국에서 월세 말고는 답이 없었다. 꾹 참고 돈을 모으는 데 집중하라는 하나마나한 조언을 해주었지만, B는 확고했다. 자신이 받을 수 있는 대출 2종류를 이용하고 형제들에게 돈을 빌리면 전세금 정도는 마련될 거라 확신했다. 그리고 본인이 어떻게 상환을 할 자신이 있는지를 전하기 위해 내게 전화를 걸었다.


B가 본론부터 말했으니, 나 역시 본론부터 말했다.

- 난 돈이 없어.

현재 수중에 현금화할 수 있는 돈이라고는 K여사에게 받은 2천만원이 전부였다. B 역시 그 사실을 알고 빌려달라는 거였다. 그 돈은 오롯이 내 것이 아니니 내가 빌려줄 수는 없다고 했다. 미안하지만 이 돈이 필요하다면, 나는 K여사에게 돈을 돌려주겠노라고 말했다. 예금 명의자만 내 이름일 뿐, 애초에 편하게 쓸 수도 없는 돈이었다. 이 돈을 B에게 빌려준다면, K여사는 내게 결혼자금을 보태주었다며 큰 소리를 칠 것이고, 이 돈으로 전세집을 구한 B에게는 전세자금을 주었다며 생색을 낼 것이었다. 그런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B는 단박에 내가 하는 말을 이해했다. 

모친의 야트막한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쓰는 중인데, 그 기반을 모친에게 빌려 쓰게 된다면 그건 원하던 자유가 아니니까.


결국은 진심에서 나오는 충고로 전화를 마무리 했다. 대출을 받아 전세를 구하지 말고 조금만 더 모아서 집을 사라. 작은 빌라 정도면 살 수 있을 테니 여기저기 돈을 빌려 아파트 전세를 얻지 말고 혼자 편히 살 수 있는 집을 사라. 지금 당장 집을 나가고 싶겠지만 조금만 더 참아라.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말고 경제적인 부분을 고려해 장기적으로 현명한 선택을 해라.



개소리처럼 들리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집을 떠났으니까. 집이라기 보단 K여사에게서 아주 멀리 떠나왔으니까. 비록 기댈 곳 없는 곳에서, 우주에 혼자 남은 기분으로 살지만 그 전 보단 훨씬 편해졌다. B가 괴로워하는 것도 이해하지만, 집에서 멀어지고 싶은 바를 누구보다 잘 알지만 해줄 수 있는 말은 그것 뿐이었다.



무슨일인지 알겠다며, 신중하게 선택하겠다며 의젓하게 전화를 끊는 B의 목소리가 더 애달프다.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나의 무능력이 원망스럽다. 너의 안위를 지켜주고 싶지만, 나에게 돌아올 짐을 안을 수는 없어 비겁한 선택을 하는 내가 원망스럽다. 기댈 곳이 되어주지 못해 미안하고, 기댈 곳을 찾을 수 없어 서글프다.



마음이 무너지는 밤에는 카운슬러 릴리가 해줬던 말들을 혼자 되뇌인다. 

- 내가 모두를 책임 질 필요가 없다.

- 그들은 스스로를 책임져야 한다.

- 정답은 아무도 모른다.

- 아직 아무 것도 잘못되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만 구원할 수 있으니까, 나는 나부터 지켜야 하니까-라는 핑계로 이 괴로움을 모른척 해본다.

미안하지만, 돈은 빌려줄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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