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가 육조를 바라본 것처럼
드라마로도 나온 천계명 작가의 웹툰 ‘좋아하면 울리는’에 이런 장면이 있다.
주인공 조조가 선오 옆에 있는 육조를 보고 뭔가를 깨닫는 장면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남자 옆에 있는 여자라서 생기는 단순한 질투가 아닌 복잡한 감정. 미워할 수 없이 해맑고 밝은, 솔직하지만 무례하지 않은 육조. 그녀를 보며 조조는 질투와는 다른 감정을 깨닫고 이런 얘기를 했다.
내가 구김살 없는 삶을 살았더라면, 늘 상상해 온 사랑바독 자란 나의 모습은 - 바로 저 아이겠지.
사랑받지 않고 자란 아이는, 그 세계가 전부인 줄 알기 때문에 외로움을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성인이 된 후 자신을 조건없이 사랑해주는 누군가를 만나고 나서야 세상에 이런 것도 있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것이다. 조조가 어느날 갑자기 알아버린 것처럼.
해외에 살면서 알게 된 친구 중에 이런 말을 한 친구가 있다.
자기가 경험한 한국 문화는 즐겁고 소중한 기억들이 많아서 본인이 아이를 낳으면 꼭 경험하게 해주고 싶다고. 한복을 입고 설날에 친척들에게 인사를 다니는 것, 우리의 고유한 문화를 가르치는 것. 그런 소소한 기억들이 정말 즐거웠기 때문에 꼭 한굴말을. 잘 하는 한국아이로 키우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은 내게 외계인을 마주한 것처럼 이질적으로 다가와서 신기하다 못해 이상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명절이라고 친척들에게 억지로 인사를 하며 듣기 싫은 소리를 듣는건 모두에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었구나.
어른들의 돈 싸움 이야기에 이리저리 눈치를 보며 눈만 감은채 새벽을 보내는 경험은 모두에게 주어지는 악몽이 아니었구나.
어떤 이들은 유년시절을 즐겁다고 기억하기도 하는구나.
그런 사람들을 보면 마음 한견이 우리하다. 부럽지도 샘나지도 않는다. 크게 공감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가까이 붙은 감정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런 말들은 나의 자아를 분리시킨다. 괴로움에 두려워하던 어린 아이와 다 알아버린 어른의 내가 분리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늘 무거운 마음에 잠긴다.
나의 삶이 누군가의 동화처럼 따뜻했다면, 도대체 나는 지금 어떤 모습이었을까.
나의 배우자는 자주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시시콜콜한 얘기를 늘어 놓는다.
눈이 많이 와서 퇴근길이 2시간이나 걸린 얘기, 직장 동료가 짜증나게 했던 얘기, 요즘 진로에 대한 고민 들까지도. 얼마나 많은 얘기를 하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하지만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배우자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노라면 왜 저렇게 시시콜콜 떠들게 되는지 이해가 된다.
어머님은 누가 봐도 여리고 따뜻한 심성을 가진 사람으로 하늘에 계신 높은 분의 뜻을 따르고 실천하는 분이다. 항상 다정한 말로 상대방을 위로하고 긍정적인 미래를 믿어주는 살마이라 수화기 너머에서 듣고 있는 나의 마음까지 위로를 받을 때가 많았다.
내가 취직을 하거나 좋은 일이 있었을 때도, 어머님은 과하지 않지만 충분히 따뜻하게 마음을 전해주셨다.
모두 내가 어릴 때 경험하지 못했던 감정들이다.
나의 어머니는 본인도 따뜻한 말을 하지 못하지만, 아마 스스로도 들어본 적 없는 사람으로 살아왔다.
나의 작은 성취들을 집으로 가져간 날엔 대견하다는 말보다는 ‘니가 어쩐일이냐’는 말이 더 자연스러웠다. 속상한 일로 눈물을 보인 날엔 ‘뭐 그런 걸로 질질 짜냐’는 윽박을 들었다. 때론 슬픈 일보다 어머니의 말에 더 상처를 받을까 두려워 힘든 마음을 추스리며 이불 속에서 혼자 울기도 했다. 그래봐야 겨우 열살 남짓한 아이였는데도.
아플 때 딱히 누구도 걱정해주지 않는 삶을 살았기에 아픔을혼자 견디는게 익숙했다. 아프다고말해도 걱정하는 눈빛을 얻을 순 없었다. 오히려 그럴 줄 알았다며 혼이나 안나면 다행이었다.
삐딱한 감정들을 듣고 보고 자란 탓일까. 구겨지다 못해 꼬깃해진 마음으로 살아왔다.
같이 웃고 떠들다가도 표정이 좀 어두운 친구를 보면 마음이 불편해진다. 내가 건넨 인사에 반가워하지 않는 동료를 보면 어김없이 생각이 멀리 동구밖으로 나간다. 자연스럽게 자책하게 되는 건 덤이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먹고 싶은게 뭐냐고 물으면 당연히 ‘상대방이 좋아하는 메뉴 안에서’를 디폴트 값으로 넣고 고민한다. 내 기분이 힘든 것보다 늘 남이 먼저다.
내 삶에서 조차 나는 뒷자석에 앉아 잊혀진 사람같은 존재였다.
안타깝게도 아주 많은 감정들을 모르고 어른이 되어버렸다. 위로가 주는 안도감도 응원이 주는 뜨거움도 모르고 자랐다.
하지만 성인은 책임을 져야하기에, 이제와 늦게 배우는 감정들을 억지로 내 삶에 우겨넣고 있다.
나는 배운적 없는 위로를, 남에게 하고 있다.
슬프지는 않다. 이제라도 따뜻함을 알게된 것에 감사할 줄 아는 기특한 어른이 되었기 때문에.
사랑받고 자란 사람들의 넘치는 귀여움이 밉지 않다. 덕분에 나도 따뜻해지니까.
다만 항상 마음 한켠에 남아 있는 안타까움이 있다. 나의 구김살 없는 버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지금도 밝고 적극적인 성격이니 그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았겠지. 다만, 시도때도 없이 불쑥 떠오르는 삐뚤어진 생각들은 좀 덜했겠지.
구김살 없는 나를 상상하며, 구질구질한 나는 무탈한 하루에도 이따금씩 슬퍼진다. 너무 열심히 살아서. 너무 많이 알아서.
이 마음을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어 혼자 쓴다. 늘 외롭고 괴로운 날의 끝에는 ‘나를 위로할 건 내 자신 뿐’이라는 생각만 확고해진다.
오늘도 마찬가지.
구김살 없는 내 모습을 상상하다 좀 쓸쓸해져서, 혼자 몰래 이렇게 쓴다.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나를 위해 쓴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저, 지금 너의 외로움 - 나는 안다고 말하고 싶어서 쓴다. 아무도 모르면 어때, 나는 아니까 괜찮아. 결국 나를 위로하는 건 내 자신 뿐이니까.
나는 알아. 니가 얼마나 열심히 버텨냈는지.
남들은 상상도 안해본 괴로움에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그리고 그 모든 걸 견뎌내고 얼마나 단단해졌는지도.
나는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