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 (허공, 공허), 결연]
1. 연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은 동시에 매 순간을 소비해 내는 행위이다. 그것이 지구 저 편 누군가의 괴로운 시간이든 지금 내 앞에 마주하고 있는 어떤 이의 반짝이는 순간이든 이 모두를, 우리는 저마다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나간다. 이는 반드시 무언가를 활동적으로 하는 것만이 아닌 단순히 앉아서 숨을 내뱉는 지극히 정적인 행위까지도 포함하는데, 나는 이를 두고 ‘생활을 소비한다’고 표현하기도 하며 단순히 그저 숨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매 순간의 시간을 적극적으로 소비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언제였을까. 모래 한 줌에도 싱글벙글 웃어대던 우리가 서로의 눈을 바라보지 않기 시작한 시점은. 저녁 시간이면 밥상 앞에 둘러앉아 리모컨 쟁탈을 일으켜온 그 네모난 바보상자가 우리의 손바닥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 아마 그즈음이었을 것이다. 나의 인격이 성인으로서의 한 발을 차츰 내딛기 시작한 그 여린 시기, 옆자리 친구들이 너도나도 모여 갖가지 유명인의 이름이 붙은 휴대폰을 새로이 자랑해 대기 시작할 무렵, 그 자그마한 기계가 있고 없고에 따라 제 가족의 부마저 드러나고 동시에 그 여린 자존감을 오르락내리락하게도 만들었던 그 잔인한 시기였으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러니까 우리의 통제력을 내어주기 시작한 때가.
산업화를 거쳐 정보의 시대에 이르러 우리는 지구의 온갖 종류의 인간들과 의도적이면서 동시에 비의도적으로 웹이라는 허상의 거미줄에 묶여 절연히 연결되고야 말았다. 위대하고도 처참하게. 이 '연결'은 이제는 너무나 당연해서 일부러 의식하려 들지 않으면 그 누구도 깨닫지 못한다는 사실이 무언의 공포 감마저 불러일으키는데, 한마디로 우리는 언제나 ON의 상태로 누구든 접촉 가능한 상태에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이 오전 4시 38분이든, 어느 저녁 어스름 당신이 노을빛에 빠져있는 그 경이로운 순간이든 할 것 없이. 부러 무인도로 도피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더 이상 진정 혼자일 수가 없게 되었다.
이렇다 보니 나의 시간을 다른 이와 공유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해진 지금 우리는 동시에 남의 시간도 똑같이 공유받을 수 있다라는 모종의 ‘권리’를 암묵적으로 받아들이고야 말았다. 지금 내가 먹은 저녁을 당장에 캐나다의 친구에게 자랑할 수도, 전 연인의 결혼 소식을 무방비하게 확인해 버릴 수도 있는 이 일련의 상황들이 외계인과 서신을 주고받는 것과 같은 해괴한 일로 취급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연인, 가족, 친구와 같은 가까운 관계에서 이 암묵적인 합의는 더욱 강력해진다. 내가 오전의 1을 공유했으니 네 오후의 3을 공유해 줘. 어제 당신이 방문한 7, 괜찮았나요? 5에 다녀오면 어땠는지 알려줘!
2. 허공
시간이 지나 매체가 발달하면서 그 형태의 전환이 걷잡을 수 없이 빨라진 이 시대에 최상의 자리를 군림하고 있는 건 단연 인스타그램이다. 그중 업로드 후 24시간 안에 보지 않으면 사라져 버리는 휘발성을 무기로 ‘앞으로 이 글은 2시간 안에 보지 않으면 사라져요.’라는 식의 어쩌면 오만하고도 독특한 방식으로 우리의 클릭을 이끌어내는 이 스토리라는 기능은 다양한 사람에게 더 다양한 방식으로 본인을 드러내게끔 만드는데, 이때 그 클릭을 미루는 순간 우리는 무언가에 뒤쳐진 듯한 기이한 느낌마저 받을 수 있다. ‘남’의 어떠한 순간을 보지 않았다고 ‘내’가 뒤쳐지는 기분이라니! 반드시 알아야 할 어제자 뉴스 기사를 놓친 것보다 누군가의 순간을 놓친 것이 어떤 이에게는 더 큰 불안감으로 작용하기도 하는데 이 기이한 현상은 말로 형용하기 어렵다.
물론 이러한 초조함은 방금 막 생겨난 게 아니다. 하지만 어느 시대에도 이렇게나 가까이, 또 즉각적이고 치명적으로 영향을 미친 전례는 없었다. 친한 지인은 물론 내가 선망하는 누군가, 또는 수년 만에 생존 신고를 하러 나타난 친구의 생활상을 몇 번의 클릭으로 알 수 있는 이 기능은 값싼 아편과 같이 기능하면서 우리의 알 권리―암묵적으로 합의된 듯 보이는―와 도파민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역할을 완벽히 수행하고 있다. 무엇보다 언제 올라올지 모르는 누군가의 업데이트를 이제는 우리가 ‘기다리게’ 만드는 지경까지 이르렀는데 이는 꽤 소모적인 비극으로 이 기다림의 시간이 가장 큰 공허함을 부르는 구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구간을 지나며 우리는 결국 우리의 소중한 하루를 ‘기다림'으로 채워가는 모순에 이르고야 만다. ‘왜 오늘은 (평소처럼) 안 올라오지?'
스토리에 대해 조금만 더 얘기해 볼까. 잊혀질 것을 알면서 올리는 것, 혹은 잊혀질 것을 알기에 올리는 것. 24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이야기를 올리는 사람들은 그것이 하루 동안은 반드시 빛나길 바라는 마음인 걸까, 아니면 꼭 하루 동안만 빛났으면 하는 마음일까. 1년, 아니 두 달만 지나도 기억하지 못할 그 짧은 단편의 순간들을 부지런히도 실어 나르는 모습은 전자에 가까울 수도 있고, 어쩌면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지닐 확률이 높다. 그래서 우리는 딱 24시간어치의 글을 올린다. 24시간이 아닌 24일 후에 사라지는 글이라면 약간의 마음을 더 쓸 것이므로.
3. 공허
톡, 괜히 한번 건드려보는 화면. 그러다 잠시 후 톡. 가만히 잘 쉬다가도 시간의 공백을 메우려 무언가 해야 할 것만 같은, 남들은 다 아는 New를 나만 놓치고 있진 않을까 하는 이 출처 불명의 초조함이 개인에게 불러일으키는 피로감은 가히 어마어마하다. 신체는 항시 긴장 상태에 놓이고 자연히 만성적인 피로감을 갖기에 이르는데, 이런 피로를 떠안으면서까지 우리는 왜 그것을 놓지 못할까? 이미 올라와 대기 중인 글을 넘어서 이제는 올라오지도 않은 미래의 New를 기다리는 자발적 대기조가 되어버린 우리의 이 수동적인 공허함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디지털에서 아날로그로 회귀하고자 하는 요즘의 트렌드는 이러한 현상과도 맞닿아 있다. 디지털은 우리를 마땅히 살아야 할 현실의 삶에서 멀어지게 만드는데 이 모든 현상은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우리를 둘러싼 연결의 거미줄이 나날이 교묘하게, 더욱 치밀하게 짜여가는 데에 원인이 있다. 그 짜여진 판은 상냥한 목소리로 '연결'의 중요성을 속삭이며 멋들어진 타인의 삶을 자연히 드러내어 의도하지 않았던―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류의―소비를 부추기는 데 일조한다. 또 그 목소리는 너무도 친밀해서 우리를 항시 남들과 비교하게 만드는 처지에 놓이게 하고 결국 '그들처럼'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형세를 면하기 어렵게 한다.
인간은 본래 자신의 내면에 있는 것을 추구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행위에서 의미를 찾으며 그들이 원하는 것을 따라 원하고자 한다. 그러나 집단에서 소외되기를 두려워하며 남을 모방하기 좋아하는 인간의 사회·유전적 특성을 감안하더라도 휴대폰이 몸에서 멀어지면 머잖아 불안증세를 보이기 시작하는 이 모습은 다분히 비정상적으로 비친다. 그 기나긴 인류 진화 역사의 티끌 수준에도 미치지 않는, 백 년이 채 되지 않은 그 짧은 시간에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 어느 정도의 심심함쯤은 견딜 줄 아는 법을 잊어버렸다.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당하는 등의 행태에는 그토록 민감한 우리가 왜 '자유'를 빼앗김에는 마땅히 분노하지 않는가.
4. 결연
빼앗긴 통제권을 되찾을 수 있을까?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지만 이 모든 것을 지내면서 겪은 기대감, 긴장감, 실망감, 좌절감을 두고 내린 결론은 있다. 연결의 플랫폼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서 동시에 외부로 향한 우리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또 눈앞의 현실로 돌려야 한다는 것. 진정 이 피로에서 해방되고 싶다면, 세상의 흐름을 모두 알고 따라야 할 필요는 없다는 이 지극히 단순한 사실을 계속해서 되뇌고 문득문득이라도 의식해야 한다. 모든 것을 알기에는 세상이 너무도 커져버렸다.
조금은 몰라도, 놓쳐도 괜찮다. 당신이 24시간 안에 알아야만 하는 남들의 이야기 같은 건 없으니까. 늘 연결된 상태에 본인을 내어주지 말고 또 내 삶을 일일이 공유해야 한다는 생각 또한 경계하자. 별이 내리고 꽃잎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반사적으로 휴대폰을 들어 그 순간을 '잡고' 또 '공유해야' 마땅하다 고 느끼는 것, 그러면서 눈앞의 현실은 뻔히 놓치는 것. 이 무의식적인 공유의 기제가 당신이 온전히 누릴 수 있었던 순간의 가치를 반감시키고 또 온전할 뻔했던 감탄은 반절이 된다. 남들의 '좋아요'를 받지 못해 오는 역설적인 슬픔 또한 이미 충분히 겪었다. 그런 사소한 클릭질 따위에 내 기분을 내맡기지 않도록 우리는 스스로를 단련해야 한다. 인간으로서 쓰고, 그리고, 걷고, 달리고, 요리하고, 먹고, 식물을 기르고, 청소하고, 눈을 마주하고, 쓰다듬고, 조립하거나, 이야기하고 웃는 것. 이런 인간다운 일에 조금 더 시간을 쓰면 우리를 잠식하고자 하는 기술에 맞서 우리의 시간과 공간을 지켜낼 수 있다.
아마 당신이 죽는 날까지 이 그물망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은 숨이 멎는 순간까지 바라고 더 나아가기를 원하니까. 그럼에도 왜 힘들여 노력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관계에서 오는 출처를 알 수 없었던 모종의 피로감이 그 답이라 하겠다. 고개를 들자. 기계는 잠시 밀어 두고 조금만 더 독립적인 인격체로 살아보자. 가능하긴 한 거냐고? 깨닫는 것이 출발점이다. 인식하면 생각하고 생각이 행동을 이끌어 결국 변화를 만든다. 그 변화에서 누군가는 새로운 인생을 찾을 수도, 아니라면 그냥 현실에 순응하기로 마음먹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눈앞에 주어진 현실만을 받아들이는, 결코 깨닫지 못하는 옛 트루먼으로 남기를 바라지 않는다. 이미 현실을 살고 있는 바깥세상의 관객들이 당신의 탈출을 응원하고 있음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