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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서영 Jun 10. 2024

잃어버린 것들에 대하여

여백에 대처하는 자세



                                           “자, 그리고 싶은 걸 마음껏 그려보세요.”

                                  라는 말과 함께 당신 앞에 주어진 A4용지 한 장과 연필.



  위와 같은 상황에서 당신은 곧 연필을 들어 선이라도 긋기 시작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뭐야, 뭘 그려야 하는 거야?’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몇 분 남짓을 초조해하는 사람인가?


  나는 두말할 것도 없이 후자에 속한다. 일단 ‘자유 주제’라는 단어에서부터 숨이 턱 막힌다. 원치 않은 너무 큰 자유가 주어짐과 동시에 그 자유로 나의 창의성을 발휘하기를 요구되는 상황에서 나는 한없이 작아지고 무서워진다. 분명 어릴 적엔 스케치북이 아깝다거나 적어도 종이를 낭비하기 싫어서 머뭇거리는 일 따위는 없었던 것 같은데, 점차 새로 산 노트 첫 장에 선 하나를 긋더라도 괜히 신중해지고 조금이라도 엇나가면 이 고귀한 새 종이에 범죄라도 저지른 것 같은 이 상황을 맞이하는 게 퍽 싫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가? 우리가 종이와 연필의 치솟는 물가 상승에 덜덜 떠는 처지에 있는 궁핍한 상황도 아니거늘 나는 왜 빈 종이 앞에서 과감해지지 못하고 되려 조심스러워진 걸까?

 

  비단 나만의 일이 아니다. 아마 당신도 후자일 확률이 높다.(전자라면 부럽다) 이렇게 갑작스레 여백을 마주하는 상황에서 왠지 모를 불안감이 싹트기 시작한 건 아마도 초등학교 무렵이었을 것이다. 나는 당시 클램프(CLAMP: 일본의 유명 여성만화가 집단. ‘카드캡터 사쿠라’, ‘X’, ‘츠바사’ 등 수십 편의 대작을 그렸다)의 그림체를 너무도 좋아해서 클램프와 같은 만화가를 꿈꾸며 만화부에서 방과 후 활동을 했다. 기본적으로 미술 시간에 평균 이상은 해냈기 때문에 더욱이 좋아했던 만화라면 더 잘 그릴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만화는 완벽한 ‘창의력’의 분야라는 걸 들어가기 전까지 인지하지 못했다. 그저 그림만 잘 그리면 될 줄 알았는데 실상 ‘무엇’을 그리는지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우리는 주로 칸을 나누어 간단한 4컷 만화를 그리기도 하고, 그냥 보기에 예쁜 눈이 큰 만화 캐릭터를 창작해 그리기도, 또는 좋아하는 캐릭터를 그대로 따라 그려내기도 했는데 나는 따라 그리는 데에만 유독 재능을 보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번엔 뭘 그리지..’하는 부담이 쌓여 자신감은 떨어지고 나는 비로소 방가방가 햄토리의 주인공인 햄토리 그리기의 장인이 되어 있었다. 정말 햄토리는 눈 감고도 그릴 수 있었다. 비교적 창의적인 만화부 친구들 사이에서 도저히 무언가를 창조해내지 못하는 내 모습에 매일같이 좌절하고는 집에 있던 만화 그리기 책들과 각종 잉크, 펜촉들을 정리하고 그 뒤로 그림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내 창의력을 심판받는 기분이 싫어서.



  그 뒤로 자연스레 만화와는 거리가 멀어졌지만 나이가 들면서 오히려 더 좋아진 것이 있다면 바로 ‘드로잉’(drawing: 소묘, 스케치 등을 포괄하는 미술 용어)이다. 드로잉 기법 중에도 특히 크로키(croquis: 회화에서 초안, 스케치, 밑그림 등을 뜻하는 용어)를 좋아하는데 크로키는 단순히 그림의 밑그림 용도로 초안을 재빠르게 그려내는 스타일로 그림의 뼈대와 같은 역할을 한다. 어디서든 펜 하나, 혹은 연필 한 자루만으로 사람이나 풍경, 건물의 분위기 등을 단시간에 종이에 옮겨내는 작업으로 세부적인 묘사에 신경쓰지 않고 느낌대로 슥슥 그려내는 간결한 선에서 나는 그림의 코어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어 좋다. 마치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사람이 주는 호감처럼, 크로키만이 주는 정갈한 분위기가 있다. 그래서 크로키를 잘하는 사람을 좋아하는데 여기서 나의 특이한 점은 그림 자체는 물론이고 그런 그림을 그린 ‘사람’마저 맹렬히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들을 향한 나의 동경심과 부러움이 결국 내게 다시 ‘아, 나도 저렇게 그리고 싶다!’는 열망을 품게끔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들에게 영어가 그러하듯, 나에게는 드로잉이 작심삼일의 대명사이다. 잘하고 싶은 욕심은 넘치고 의지도 충만한데 막상 연습하기 시작하면 내가 여기에 이렇게 선을 그어도 되는 걸까, 하며 한 발, 아니 한 손 물러나고 마는 게 문제다. 나의 무용한 완벽주의가 대충대충의 선을 참아내지 못하는 모양이다. 작심삼일이면 다행이지 때로는 작심 하루이틀이 되기도 하는데 그러면서도 다른 이의 그림을 보면 다시금 부러움과 열망이 샘솟는 것이 반복되면서 나는 거의 N년째 자발적으로 쓰러졌다가 일어나는 안쓰러운 오뚝이 행세를 자처하고 있다. 그분들은 최소 수 백장 이상의 그림을 그리며 자신과 싸우는 인고의 시간을 거쳤음을 충분히 앎에도, 비교적 끈기 있고 목표한 것은 꼭 이뤄내는 것에 자부심을 가진 나인데도 왜 이놈의 드로잉만은 그들처럼 ‘꾸준히’가 안 되는지 여전히 미스테리다. 보는 걸로 만족하면 좋을 것을 왜 굳이 나도 ‘그리고’ 싶어하는 거냐고..! 저주받은 관성이 원망스럽다.



  어떤 이의 글을 보면 그 사람의 성격이나 태도가 글에서 보인다고 믿는 편인데 이는 그림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어떤 사람은 단조롭고 차분하며 딱 필요한 선만 깔끔하게 긋는 반면, 누군가의 선은 굉장히 조심스럽고 세밀한 완벽을 추구하는 성향이 느껴진다. 후자는 내 이야기다. 나는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면 어느 정도 칭찬받을 만한 그림을 곧잘 그려낼 수 있다. 초집중 상태로 촘촘하고 치밀하게 선을 쌓은 결과물은 대부분 배신하지 않는다. 다만 동그라미 하나를 그려도 작은 선을 여러 번 끊어서 이어 붙이는 형태로 완성했던 어린 시절의 나는 참으로 두려운 게 많았던 모양이다.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완벽히 해내고 싶어서. 스스로 세운 기준치에 미달하거나 작은 실수도 그냥 넘기기 어려워하는 다분히 꼼꼼한 성격이라서, 즉 자기 자신에게 관대하지 못한 사람이라 그게 그림에도 그대로 드러나고 그것이 마치 족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런 기질은 여전해서 나는 그림도 글도 자유롭게 쓰는 사람을 항시 동경한다. 새로이 알게 된, 내가 동경하기로 마음먹은 몇몇 사람들의 기록법을 살펴보니 모두가 줄노트가 아닌 무지 노트를 쓰고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경계 짓는 선에서 벗어나 넓게 펼쳐진 여백 안에 자신의 방식으로 글과 그림을 마음껏 기록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나로부터 탈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평소 들고 다니던 노트를 빽빽이 글씨로 들어찬 ‘줄 노트’에서 ‘무지 노트’로 바꿔버리고는 어떻게든 어디서든 막 끄적여 보기로 했다. 끄적이는 걸 노력했다고 비웃지 마시라. 주어진 선 위에서만 살아온 사람이 사라진 선의 자리에 이제는 여백뿐인 망망대해에 글을 적기란, 평생을 정해진 대로 살고 그 위에서 올바르게만 살던 학생이 자유롭고 불량한 친구를 사귀어 ‘일탈’하려는 마음가짐을 가진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러니까 나는 내 성격을 자유롭고 유연하게 바꾸기 위한 일탈의 방법으로 나를 지탱해 온 ‘줄’이라는 안전장치를 내다 버린 것이다. 초반은 웃기고 처참했다. 내 글씨는 원래 제 모습을 받쳐주던 안전한 가이드라인을 잃고는 쉽사리 내려앉을 자리를 찾기 어려워했다. ‘이게 뭐라고 그래. 뭐라도 그어보라고, 뭐라도.’ 끝없는 자기세뇌와 끄적임 훈련을 통해 급기야 모서리에도 써보고, 글씨를 마구잡이 물결 모양으로 흘려도 써보고, 뜬금없이 정 중앙에 써보기도 하다가 언젠가는 일부러 여백을 남기기도 하면서 정말 이래서는 안 되는 느낌, 말 그대로 원하던 일탈이 되는 기분이었다. 만세! 무지노트 하나로 비행청소년의 일탈을 느껴봤다고 하면 또 비웃으려나. 어찌 됐건 금단의 영역과도 같던 무지 노트를 통해 나는 조용히 나는 법을 터득했다.



  분명 어릴 땐 마음껏 그려 보라며 싫어도 손에 쥐어줬던 크레파스를 종이 위에 누비고는 연신 칭찬만을 받았거늘, 어느 순간부터 어른들은 ‘거긴 그리면 안 돼.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이리 줘봐’ 하며 주어진 틀 안에 우리를 욱여넣은 게 아닐까. 창의적인 아이로 자라길 바라면서도 그러한 환경은 마땅히 조성해주지 못한, 언제나처럼 참 모순적인 게 어른이라는 존재였다. 그래서 아마 나의 창의성이 현주소에 있는 거라고, 이건 어른들 탓이라고 책임을 가벼이 떠넘겨 버리고는 이제라도 잃어버린 것들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자 했다. 또 그러면서 나는 그런 어른이 되지 않겠다,라고 다짐하기도 한다. 미래의 내 아이에게만은 손에 꼭 크레파스를 쥐어 주고는 끝까지 그 아이가 그려내는 세상을 내 기준으로 판단하고 방해하지 말자고, ’돼. 안 돼’와 같은 말이 튀어나오기 전에 꼭 두 번 더 생각하자고. 그 아이의 세계는 반드시 그 아이가 온전히 펼쳐내도록 ‘그냥 두기’를 스스로 되새기자고 다짐했다. 잃어버린 창의성은 나이 들어 되찾기에 너무 어렵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아마 각자에게도 나의 ‘드로잉’과 같은 대상이 있을 것이다. 잘 만들어진, 무언가 잘 되어진 것을 보며 ‘나도 언젠간’이라는 꿈을 품게 하는, 누군가의 시간과 노력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들. 그래서 시도해 보지만 머지않아 손을 놓고는 또 허망히 부러워하는 것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노력의 시간을 하나하나 켜켜이 쌓아내 1년 이상의 시간이 되면 결국 어떤 형태로든 변화한 나를 볼 수 있지 않을까-생각한다. 나는 아직 원하는 경지의 10%도 도달하지 못했지만 가끔 ‘달과 6펜스’의 주인공인 스트릭랜드(그림, 예술의 독실한 추구를 위해 사회와 가정을 떠난 40대의 가장)의 행보를 응원하던 내 모습을 떠올리며 희망을 버리지 않으려 한다. 그의 도피에 가까운 행동은 결코 사회에서 인정받기 어려운 이기심으로 비치지만, 그가 비난받을 때 나는 오롯이 그를 응원했다. 안정된 인생을 내버리고 자신의 생을 바쳐버리기에 이르는 그의 예술을 향한 열정은 결코 평가받을 수 있는 항목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그는 나처럼 잃어버린 창의력 따위를 한탄할 시간에 그저 한 점이라도 더 긋는 ‘행동하는’ 사람으로 내가 존경하기에 충분한 인물이기도 했다. 분명 사회에서 용인되는 도덕적인 행동은 아니었지만, 그런 그를 떠올리며 거침없이 행동해 버리는 자유로운 사람들 속에 속하고 싶은 마음을 수없이 되새김질한다.



  나는 언제나 틀리고 싶지 않아 했다. 매사에 틀릴까 두려웠다. 그러나 점차 구부러지고 싶어 하는 직선처럼 계속해서 무참히 틀리고 싶어 하는 어른으로 비뚤게 자라 버렸다. 청개구리일까? 너는 왜 시대를 역행하냐는 핀잔도 받지만 그냥 그러고 싶은 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내가 진짜 그렇게 해도 될까, 안 될까와 같은 망설임이 생겨날 때 그냥 해 보고 말아 버리는 훈련 중에 있다. 지난한 과거를 발판 삼아 되고자 하는 모습으로 나아갈 때 언제나 동경, 희망이 그 동반자가 되어주었다. 스트릭랜드의 일면을 보고 단순히 비난하기에 앞서 그를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이 또한 많아졌으면 좋겠다. 한계를 버리고 빛을 향해 비로소 나아가려는 사람에게 '그래도 돼’라고 응원하는, 적어도 방해하지는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아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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