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niMeow Apr 29. 2019

사는 것과 살아지는 것

한의사의 요양병원 근무 일기 (3)

환자들이 요양병원으로 거취를 옮기게 되었을 때보이는 반응은 여러 가지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죽음에 대처하는 방법도 모두 다를테니까. 내 신체가 자유롭지 못하게 되는 것, 사회적으로 충분히 기능하지 못하는 것, 늙어가는 것에 대해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이 다르듯 말이다.



 두려움, 공포, 수치심, 분노, 억울함, 간혹.. 담담함.


 교차하는 수많은 감정들 속에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들은 자기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너무 잘 알고 있다('자기앞의 생', 에밀 아자르 중에서)"는 것이다.

 요양병원으로 옮기는 순간 이미 노인들은 사회적인 사망선고를 한 차례 겪은 셈이다. 돈을 벌고 사회생활을 할 수 없다고 타의적으로 판단되어 버렸으며, 쌀을 씻어 밥을 안치는 일이든 새벽부터 물건을 싸들고 장에 나가 파는 일이든 수십 년간 해오던 어떤 일을 한순간 멈추게 되었다.





  분노해서 싸우는 사람이 있다.

 왜 나를 여기 가두었냐고, 배은망덕한 자식들을 욕하고 간호사에게 매일 같이 화내고, 탈출구를 찾아 침대에서 뛰쳐내려오는. 아직 나는 일할 수 있고, 내 몸 정도는 혼자 건사할 수 있다고.


 절망하고 체념하는 사람이 있다.

자식들에게 버림받고, 나를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으니 이제 나는 죽을 일만 남은 거라고. 더 이상 살아도 사는 의미가 없다고.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하는, 아니 찾기를 포기하는 사람.


 슬퍼하여 연민하는 사람이 있다.

이렇게 되어버린 나에 대한 연민, 옆 침대 불쌍한 다른 노인에 대한 동정, 늙어갈 수 밖에 없는 자연의 섭리에 대한 한탄. 과거의 건강하고 당당했던 자신의 모습을 미화하면서 현실에 대해 끊임 없이 눈물흘린다.


 희망을 가지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

 건강이 좋아지면, 상황이 좋아지면 다시 모시고 살 거라는 가족의 말을 생명줄로 꼭 붙잡고 살아가는. 모든 치료도 챙겨 받고, 받은 약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먹고. 병원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에게 말 잘들을 게요 고쳐주세요 몸이 너무 좋아졌어요, 선생님께 사랑받으려는 초등학생 아이처럼 방긋방긋 웃음짓는.


 현실을 회피하고 도망가는 사람이 있다.

 어쩌면 무의식 깊은 곳에서는 현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있는 이 장소와, 시간과, 주변 사람들과, 모든 것을, 내가 누군지인지 조차 조금씩 잊어버리려는 사람들이 있다. 낮과 밤도 요일도 이름도 모든 것을 기억 저편 어딘가에 꼭꼭 묻어 숨겨둔 뒤에 다시는, 꺼내지 않는다.





 죽음과 노화에 맞서 싸우려는 사람들은 생의 가장 마지막 순간까지도 포기하지 않았다. 악착같이 도움을 청하고 발버둥치면서 내 것, 내 생명을 지키려 했다. 최후까지도 내가 이길 수 있다는 굳은 신념을 가진 채로.


 어떤 이들은 오히려 존엄성이 무너지는 것을 견딜 수 없어했다.

 누운 채로 볼일을 보는 것, 볼일을 봤으니 뒤처리를 해달라고 부끄러움에 떨리는 목소리로 부탁하는 것, 공개적인 장소에서 성기 항문 곳곳을 발가벗겨 들어올려 가며 닦아 주는 것, 수저를 드는 것도 여의치않아서 옷과 침대보에 음식을 묻혀야 식사할 수 있는 것, 갓 태어난 어린아이처럼 취급받으며 모든 일에 주의 받고 보살핌 당하는 것.

 간혹 곡기를 끊어서 존엄성을 유지하려는 노인들이 있었다.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모든 식사와 치료를 단호히 고개 흔들어 거부하고 눈을 감고 입을 꾹 다물어 버린다. 의지가 무색하게도, 여러 검사 수치들이 방관할 수 없을 지경이 되면 포도당 주사를 놓거나 콧줄을 끼워 유동식을 코로 밀어넣어서 영양을 공급한다.

 삶의 끈은 생각보다 질겨서 쉬이 끊어낼 수 없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노인의 투쟁은 몇 달씩 이어지곤 한다.




 누구에게든 자신의 삶은 너무나 무거워서 함부로 내던져버리기도, 짊어지고 살기도 어렵다. 다른 사람이 '그걸 이만 내려놓는 게 좋겠다'거나, '그래도 소중하니 좀 더 들고 가보라'거나 할 수는 더더욱 없을 일이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과 싸우거나 타협하거나 포기하는 여러 모습들을 보면서 나는, 언젠가 결정해야만 하는 순간이 온다면 '나'는 과연 어떻게 해야하는 것일까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은 먼 훗날의 일이겠지만 그런 순간에, 삶과 어떤 형태로 마주할 지 정도는 내가 직접 정하고 싶다고, 간절히 생각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뻔한 이야기라고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