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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소 Aug 22. 2023

Prologue : 까막눈에서 독일어 생활자가 되기까지

인내심도, 엉덩이 힘도 없는 한 사람의 평범한 공부기

하얀 강의실에 처음 발을 내딛던 때를 기억한다. 내가 선택한 이 언어에 대해 점 하나 찍혀 있지 않은 깨끗한 백지상태였던 나를. 새로운 언어에 대한 기대만으로 충만했던 그날을. 


그리고 5분 만에 부서진 찬란한 긍정 상태를. 


그렇지만 폐허에서도 싹은 튼다. 우리 모두에게는 씨앗이 있기에. 


2020년 1월, 나는 새해를 맞아 독일어 공부를 시작했다. 당시 한국 나이로 스물아홉이 되던 해였다. 독일어 알파벳을 어떻게 읽는지도 몰랐다.


2023년 7월, 나는 독일어 시험에서 가장 높은 등급인 DSH-3를 받고, 베를린의 한 종합대학에 독문학 전공으로 합격했다. 10월부터 시작될 강의는 모두 독일어로 이루어진다. 이제는 사라진 한국 나이로 서른둘, 만 나이로는 서른하나다. 


이 글은 3년 반의 독일어 공부 이야기다. 까막눈에서부터, 독일어로 뉴스를 보고 라디오를 듣고 전공공부를 하게 되기까지 누군가는 짧다고, 누군가는 길다고 할 3년 반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난다 작가의 만화 『도토리 문화센터』에서 좋아하는 장면이 있다. ‘도토리 문화센터’의 토지 지분을 갖고 있는 소유주이자 열혈 수강생인 지옥길(성은 지, 이름은 옥길)은 60이 넘는 나이에도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문맹이었다. 그런 그가 문해 교실에서 한글을 한 자 한 자 배우고 수많은 간판이 있는 거리에 나가는 장면에 독백이 이어진다.


글자를 알고 나서, 세상에 궁금한 게 많아졌어요. 
낮도 밤도, 달도 별도 꽃도, 토리 세탁소도 달님 미용실도, 
어제도 있고 그제도 있었던 것들일 텐데
왜 이제야 내 세상에 생기난 것 같을까요.


새로운 언어를 알게 된다는 건 그 언어의 세상이 내 세상에 들어오는 일이었다. 이전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단어가 눈에 띄고, 그로 인해 내 세상이 넓어지는 일. 더 많은 것이 궁금해지는 일이었다.


그 과정을 공유하려고 한다. 인내심도 없고 엉덩이 힘도 없는 한 사람의 평범한 공부기. 내 인생에 공부는 수능 이후로 끝이라고 생각했던, 누워 있는 게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게으른 인간과 독일어와의 싸움. 대단한 공부법이나 특별한 시험 합격 팁 같은 건 줄 수 없지만, 외국어 공부를 시작하고 싶지만 이미 늦었다고 생각하는 누군가나 지금도 열심히 공부하다 스스로의 두뇌를 책망하며 지쳐 있을 누군가에게 “쟤도 했는데 나도 할 수 있겠다.” 정도의 희망을 줄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알파벳도 모르던 제2외국어 공부기>는 매주 화, 목, 토요일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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