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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소 Aug 24. 2023

독일어 일자무식의 무모한 목표

독일어로 석사를 하겠다!

외국어 공부를 시작하는 이들의 목표는 각양각색이다. 여행을 위한 단순 회화이거나 문화에 대한 관심이 외국어 공부로 이어지거나, 실제 업무에서 필요한 경우 등 수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삶이 지루해서, 뭔가를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서 일수도 있다. 


독일어를 배우기로 결심하기 직전, 그러니까 2019년 연말의 내 상황은 뒤죽박죽 엉망이었다. 2017년부터 2018년까지 첫 번째와 두 번째 회사가 각각 입사한 지 3개월, 5개월 만에 망해버려서 일자리를 잃었다. 첫 번째 회사의 프로젝트 팀이 대기업에 합류하게 되어 부름을 받아 다시 일을 시작한 곳이 세 번째 회사였다. 그리고 또다시 3개월 만에 그로부터 5개월 전 면접을 봤던, 정말 가고 싶던 회사에서 연락이 와서 다시 한번 이직을 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1년 3개월 만에 네 번째 회사에 입사한 것이다. 그곳에서 일을 시작한 지 3개월 만에 결혼을 하고 이곳에 뼈를 묻어야지 생각했다. 이제 좀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삶은 역시나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내 꿈의 직장에서 지독한 마음의 병을 얻게 될 줄은... 


어느 정도의 운명론자로서, 상황이 구렁텅이로 치닫자 생각했다. 


“이건 신의 계시인가? ‘너는 회사를 다니면 안 된다.’라고 지금까지 계속 일러주고 있는데 내가 운명을 거스르는 행동을 하고 있는 건가?” (무교인도 이런 생각을 한다.)


이미 신은(어떤 신인지 모르지만) 나에게 여러 번 경고를 했다. 첫 회사를 3개월 만에 폭파시키고, 두 번째 회사도 5개월 만에 폭파시키고. 3번째 팀도 결국 내가 회사를 나온 다음 얼마 지나지 않아 해체됐고, 이번 회사는 50년이 넘은 회사라 폭파는 못 시키지만 내가 버틸 수 없는 환경을 계속해서 조성하고 있다... ‘이래도 버틸 거야? 이래도?’


그럼 난 뭘 해야 하지? 


오래전부터 품고 있던, 그 응어리를 이제는 정말로 풀어야 하는 걸까? 


언제나 유학을 가고 싶었다. 아주 어린 꼬맹이 시절부터. 부모님께 손을 벌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내 생활을 위해서도 돈을 벌어야 했다. 몇 번 왔던 기회를 흘려보내고 ‘나는 아마도 할 수 없겠지.’ 하고 생각하던 나날이었다. 시간이 더 많이 흐르면 정말로 할 수 없겠지. 


대학시절부터 취준생, 그리고 네 번의 회사생활까지 모두 지켜본 산이 얘기했다. 


“더 늦기 전에 같이 가자.”






처음엔 당연히 영미권을 생각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맛있는 음식과 여행, 쇼핑이 우리를 스트레스 가득한 일상에서 구원하던 시절이었기에 우린 버는 족족 탕진잼을 시전하고 있었다. 영미권의 학비와 생활비를 감당하기에 우리는 너무 가진 게 없었다. 영국은 너무 비싸고, 미국은 총 맞을까 봐 싫고, 캐나다는 너무 추웠다. 호주는 한국인이 너무 많아서 영어를 제대로 못 배우지 않을까? 그러다 문득 약 6-7년 전 홀로 떠난 유럽 여행 중 만났던 한 아이의 말이 떠올랐다.


독일은 학비가 무료예요.


당시로부터 고작 한 달 전, 결혼 1주년 기념으로 독일과 스위스에 여행을 다녀왔었다. 산도 나도 독일에 대한 인상이 좋았다. 그리고 이십 대 초반 파리에서 소매치기를 당하고 독일로 도망쳤을 때, 나를 감싸던 (비교적) 안전한 분위기에 풀렸던 마음이 기억났다. 이곳이라면 살아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그 마음도. 


“이왕 가는데 학위 하나는 따와야 하지 않겠어?”


영화를 전공한 나는 시나리오 공부를 좀 더 하고 싶었고, 영화뿐 아니라 드라마, 게임 시나리오 등 다양한 분야로 확장할 수 있는 글쓰기에 관심이 있었다. 그런 나에게 딱 맞는 것 같은 전공이 마인츠 대학교에 있었다. 그런데 모든 수업이 독일어로 이루어지고, 입학을 위해서는 독일어 최고 등급인 C2 레벨의 어학 성적이 필요했다. 


어쨌든 회사는 당분간 더 다녀야 했다. 독일에 가더라도 초기비용이 필요하니까. 그렇지만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신청할 수 있는 만 30세까지였다. 최대 2년. 그 사이에 자금을 모으면서 독일어 공부를 하자. 대학원 공부가 가능할 정도의 수준이 될 확률은 아주 낮지만 그냥 일단 시작해 보기로 했다. 1년 워홀하고 돌아와도 된다는 생각으로.


목표는 클수록 좋지 않겠어? 수능 이후에 공부는 때려치웠지만 회사를 다니면서 앞으로의 미래가 전혀 그려지지 않던 내게 아주 작은 빛이 보이는 듯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그리고 독일에서 대학원을 다니는 미래를 상상했다. 독일어를 능숙하게 하며 한국인이 아닌 학생들과 교류하는 멋진 내 모습을. 


어떤 의지와 목표도 한순간에 부술 수 있는 인간이 나라는 걸 잘 알고 있기에 바로 그날 독일어 학원에 등록했다. 1년 반 안에 C2를 딴다! 독일어로 A, B, C도 어떻게 읽는지 모르는 때였다.



*<알파벳도 모르던 제2외국어 공부기>는 매주 화, 목, 토요일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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