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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소 Aug 26. 2023

학원에서의 첫날, 벌써 망한 것 같다

새로운 외국어를 배우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다짐한 일은, ‘영어처럼 배우지 말자.’였다. 토익 900점 이상, 토익 스피킹 7등급을 받고도 영어로 가벼운 스몰토크도 못 하는 사람, 그게 나였다. (일생을 벼락치기로 버텨온 인간은 시험 직후에 모든 걸 다음 끼니와 함께 까먹는다.) 이번 외국어는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언어를 습득하는 것처럼, 즐겁게, 스트레스 받지 말고, 기초부터 차근차근 말하기와 독해 능력을 동시에 키워나가고 싶었다. 독일어 시험 C2 등급이라는 목표가 있지만, 문법 위주의 시험만을 위한 공부를 하지 않기로. 독일어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기 때문에 하얀 도화지 위에 아름다운 물감이 번져 흡수되는 것처럼 그 언어를 깨끗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아주 좋은 바탕을 가진 거라고, 애매하게 알고 있어서 기초부터 새로 다지려면 지루해지는 영어 공부보다 훨씬 나은 조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현지 어학원의 시스템과 가장 비슷하게 운영한다는 학원을 골랐다. 하루에 4시간씩 수업하는 인텐시브(intensive) 코스를 듣고 싶었지만 오전을 비울 수 없는 노동자 신분이었고 가격이 상당했기 때문에 대신 일주일에 한 번 오프라인 수업을 듣고, 주중에는 인터넷 강의로 집에서 공부할 수 있는 강좌를 선택했다. 


유럽 언어의 레벨은 보통 CEFR(Common European Framework of Reference for languages)이라고 불리는 유럽언어공통기준에 따라 분류되는데 A1-A2-B1-B2-C1-C2 총 6단계로 나뉜다. A1가 가장 낮은 초보 단계, C2가 원어민과 비슷한 수준의 가장 높은 등급이다. 내가 선택한 학원에서도 이 기준에 맞춰서 강좌를 제공하고 있었고 나와 남편인 산은 나란히 A1반에 등록했다.






2020년 1월의 첫 화요일, 우리는 퇴근 후 학원을 찾아갔다. 입구를 찾아 조금 헤매다 들어간 학원은 규모가 크지 않고 아담했다. 이전 수업이 막 종료된 듯 복도에 수강생들과 원어민 선생님들이 복닥거렸다. 카운터에서 교재를 받아 강의실로 들어갔다. 우리를 포함해 10명 남짓의 인원이었다. 


새로운 일을 처음 시작할 때의 들뜬 마음과 긴장이 뒤섞인 채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선생님이 들어왔다.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면서. 한국인 선생님이라 안심하고 있었는데 엄청 빠른 혼돈의 언어가 귀에 꽂혔다. 벙찐, 멍청한 얼굴로 입을 헤-벌리고 있었더니 그제서야 선생님은 한국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자, 그럼 첫 시간이니까 한 명씩 자기소개를 해볼까요? 독일어 공부는 처음인지, 처음이 아니라면 어디서 어떻게 배웠는지도 말씀해 주세요~”


햇병아리 왕초보 중 하나가 되어 함께 알파벳부터 차근차근 배우려던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우리를 제외한 모든 수강생이 이미 독일어를 배운 적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대학교 교양 수업으로 배우고, 고등학교에서 배우고, 심지어 독일에 교환학생을 이미 다녀온 이도 있었다. 게다가 단 한 명의 수강생만 우리보다 나이가 많고 모두 한참 어렸다. 알파벳도 어떻게 읽을 줄 모르는 쌩왕초보는 그곳에서 고작 둘, 산과 나였다. 아니, A1 수업인데 왜 독일에서 살다 온 사람까지 있는 거지...?


선생님은 우리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시작과 함께 조금 주눅이 들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수강생이 기초적인 내용은 알고 있는 상황이었고, 인터넷 강의 독학과 병행해 하나의 레벨을 8주 만에 끝내는 강좌였기 때문에 하나하나 기초를 단단히 다지고 싶었던 바람과는 달리 각 내용을 꼼꼼하게 들여다볼 시간이 없어 진도가 아주 빠르게 넘어갔다. 설상가상으로 내 공부 뇌는 전혀 기름칠이 안 된 쇳덩이나 마찬가지였다. 정보가 하나 들어올 때마다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구 삐그덕거렸다. 에...? 뭐라는 거야...? 에...? 


그런 상황에서 독일어 관사를 맞닥뜨렸다. 영어로 the에 해당하는 정관사와 a/an에 해당하는 부정관사. 교재 페이지를 넘기자 난데없이 표가 나타났다. 표가 왜 나오지...? 


독일어 정관사와 부정관사 변화표 (출처 : easy-deutsch.de)


그렇다. 독일어의 모든 명사는 성(性)이 있다. 심지어 그 성의 종류는 3가지다. 여성, 남성, 중성. 예를 들어 연필은 남성이고 핸드폰은 중성이고 시계는 여성이라는 식이다. 고전적인 가치관으로 단어의 느낌이 남성적이거나 여성적이라고 추론할 수도 없다. (치마는 남성이고 원피스는 중성...) 각각 성에 따라 관사가 붙고, 당연히 다 다르게 생겼다. 거기에 더해 복수의 성까지 다르게 쓰기 때문에 4가지다. 


황당한 것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관사들은 문장에서 쓰이는 역할, 즉 격(格)에 따라 또 변화한다. 명사가 주격(Nominativ-1격)으로 쓰일 때, 목적격(Akkusativ-4격)으로 쓰일 때, ‘~에게’(Dativ-3격)로 쓰일 때, 소유격(Genitiv-2격)으로 쓰일 때 관사의 생김새가 다 다르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정관사에서 16가지, 부정관사에서 복수를 제외한 12가지의 경우의 수가 생긴다. 


영어와 비교해서 예시를 들어보자.


그 개는 나를 좋아해. 

(영어) The dog likes me. -> (독일어) Der Hund mag mich.


나는 그 개를 좋아해.

(영어) I like the dog. -> (독일어) Ich mag den Hund.


나는 그 개에게 선물을 줘.

(영어) I give the dog a toy. -> (독일어) Ich gebe dem Hund ein Spielzeug.


그 개의 장난감은 곰인형이야.

(영어) The toy of the dog is a teddybear. -> (독일어) Das Spielzeug des Hundes ist ein Teddybär.


...............

혼란의 도가니탕이 아닐 수가 없었다.






수업이 끝나고 멍한 표정으로 학원을 나온 우리는 터덜터덜 걷다 서로를 보고 어이없어하며 웃기 시작했다. 


“아니, 단어에 성이 대체 왜 있어?”

“남자랑 여자가 남성 여성인건 알겠는데 소년은 남성이면서 소녀는 왜 중성임?”

“내 말이. 개는 남성이고 고양이는 여성이래. 암컷 개랑 수컷 고양이 왜 무시함?”

“미친놈들이야.”

“나 머리 아파, 진짜로.”

“나도.”

“우리 망한 거 같아.”

“이 나이에 무슨 공부냐. 머리가 하나도 안 돌아간다. 너 진짜 대학원 갈 수 있겠어?”


앞이 막막했다. 하필 어렵기로 소문난 독일어를 선택하다니. 학비가 무료라는 데 홀랑 넘어간 잘못으로 구렁텅이에 빠져든 것 같았다.


“몰라......”


아무 생각이 없어진 산과 나는 그렇게 치킨이나 먹으러 갔다.





*<알파벳도 모르던 제2외국어 공부기>는 매주 화, 목, 토요일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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