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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소 Aug 29. 2023

한번 벼락치기 인생은 영원히

인간이 쉽게 변하면 세계평화가 오고도 남았다

*지난 이야기


인생의 쓴 맛을 보던 ‘나’는 미래를 고민하던 중, 독일 대학원 학비가 무료라는 생각에 혹해 남편 ‘산’과 함께 무작정 독일어 공부를 시작한다. 독일어 알파벳도 읽을 줄 모르던 그들은 호기롭게 시작한 첫 수업에서 단어에 붙은 생식기와 10가지가 넘는 관사 변화 펀치에 넉 다운 되고 치킨이나 먹으러 가는데...  


https://brunch.co.kr/@ran-away/39

https://brunch.co.kr/@ran-away/40



혼돈의 첫 수업을 치킨으로 달래고 돌아온 산과 나는 엄청난 위기감 앞에 섰다. 


‘설렁설렁하다가는 이거... 망하기 십상이구만.’


우리가 생각한 왕초보반은 마치 유치원처럼, 


“사과는 뭘까요~?”

“음... 모르겠어요~”

“사과는 Apfel! 자, 따라 해 볼까요~”

“압펠!”

“참 잘했어요~^^*”


분명 이런 것이었는데... 


성인 대상 강좌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남는 게 시간뿐인 어린이들과 달리, 시간을 쪼개 쓰는 성인에게 그런 여유로운 수업은 사치였다. 어렵게 낸 시간에 걸맞은 확실한 성과, 시간 대비 효율적인 학습량, 최단기간 목표달성 같은 기획의도만이 성인들의 선택을 받을 수 있었다. 내가 선택한 수업도 그랬다. ‘2달 안에 A1 한 권으로 끝내기’였으니까. 


게다가 우리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자각했다. 우리의 뇌는 더이상 예전 같지 않다는 것. 더 이상 팽팽 돌아가던 그 시절의 뇌가 아니다. 우리는 둘다 벼락치기로 일생을 버텨온 인간들이었는데, 그마저도 가능했던 건 젊고 싱싱한 뇌가 있어서였다는 걸 자각했다. 내내 술을 퍼마시다가 시험 전날 밤을 새고 시험을 쳐도 F를 면했던 건 젊어서였다. 몇 년 동안 공부 뇌를 전혀 쓰지 않고 살아온 우리는 뇌가 굳었음을 피부로 느꼈다. 어렵지 않은 내용인데도 이해가 안 되고, 새로운 정보를 너무 빠르게 잊었다. 알콜과 세월의 무서움이었다.


이 수업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공부의 왕도인 ‘예습과 복습을 철저히’ 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원래라면 수업 전후로 예습과 복습을 해야 하지만, 현재 우리의 직업은 학생이 아니라는 핑계로 공부법을 살짝 수정했다.(능력이 떨어졌음을 인정하더라도 추가적인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이 또 인간이다.) 일단 강좌의 취지에 맞게 수업 전 인터넷 강의로 미리 수업 시간에 다루는 내용을 잘 숙지하고, 수업 시간을 복습이라고 생각하는 거였다. 


일주일에 들어야 하는 인강은 5-7개의 강의였다. 매일 하나씩, 30분 정도의 동영상을 보는 일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신혼집이었던 7평짜리 오피스텔. 퇴근 후 그 작은 집으로 돌아가 저녁을 먹고, 그릇을 치운 식탁에서 나란히 인강을 들었다. 함께 공부하는 스터디 메이트가 집에 있으니 배운 내용을 서로에게 확인하기도 하고, 장난도 치면서 즐겁게 공부할 수 있었다. 혼자 공부하는 것보다 훨씬 이롭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 둘은 아주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말았다.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고, 게으른 스터디 메이트 둘은 결국 함께 사이좋게 망한다는 사실을...






저질체력 둘은 퇴근 후의 에너지 레벨이 일정하지 못했다. 노동 강도가 세거나 업무 중 스트레스가 심했던 날이면 집에 와서 쉬고 싶었다. 둘 중 덜 피곤한 사람이 나머지를 격려해서 같이 공부하게 되는 그런 이상적인 그림을 그렸지만, 우리는 이런 식이었다.


“나 오늘 너무 피곤해...”

“그래도 공부해야지.”

“어차피 30분짜린데 그냥 내일 두 개 들으면 되지 않을까?”

“흠... 그건 그렇네. 그럼 오늘은 푹 쉬고 내일은 진짜 하는 거다?”

“응.”

“그래. 그럼 그냥 놀자!”


다음 날, 


“자, 이제 밥 먹었으니까 공부하자!”

“아... 왜 이렇게 하기가 싫냐.”

“그래? 사실 나도...”

“우리 주말에 할 일 없지 않나? 주말에 시간도 많은데 그때 딱 집중해서 하는 게 낫지 않아?”

“그건 그래. 집에서는 집중이 잘 안 되니까 주말에 까페 가서 공부하고 오자.”

“그러자. 원래 침대가 바로 옆에 있으면 공부를 할 수가 없음.”


주말, 갑자기 일이 생기거나 집중력 저하로 1-2시간 하다 그만둠.


롤러코스터의 노래처럼, 습관이란 건 무서운 거더군. 한번 벼락치기 인생은 나이를 먹고도 고쳐지지 않는다. 꼼꼼하게 해야 하는 예습은 결국 수업이 열리는 화요일 전날인 월요일 벼락치기로 대체되었다. 월요일에 갑자기 야근을 하거나 하는 날이면 프리랜서인 산은 화요일 수업 직전까지 인강을 듣다 오기도 했고, 나는 점심시간에 겨우 강의 페이지를 켜고 2배속 재생으로 훑어보고 가는 일도 있었다. 


그렇게 제대로 된 예습 없이 수업을 가면 또 휘리릭 지나가는 진도를 훑고 오기 일쑤였다. 후회로 얼룩진 화요일, 수업이 끝나고 학원을 나오면 항상 새롭게 다짐했다. 


“이번 주에는 진짜 열심히 공부하고 오자.”

“이번 주는 진짜 하는 거다?”

“이번 주는 게임이랑 넷플릭스 금지. 밥 먹고 바로 인강 들어.”


그리고 다음 날인 수요일에는 약속을 지켰다.

그 이후 목요일은 보통 야근을 했고... 

금요일은 금요일이니까 안 함. 

토요일은 일요일이 있으니까 안 함.

일요일은 진짜 안 되겠어서 함. 다 못 함.

월요일에 겨우 마저 함.

화요일 수업.


작심삼일도 안 되는, 작심하루나 겨우 하는 인간들의 이런 일상이 매주 어떠한 변화도 없이 계속되었다.




*<알파벳도 모르던 제2외국어 공부기>는 매주 화, 목, 토요일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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