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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소 Aug 31. 2023

코로나 발발, 학원이 문을 닫을 줄이야

새로운 세상에 함께 온 바이러스

비록 벼락치기로 지식을 쑤셔 넣고 있었지만, 한 달이 넘게 꾸준히 인강과 오프라인 수업을 병행하다 보니 독일어가 더는 외계어 같지 않았다.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던 관사와 동사의 변화가 점차 익숙해졌고, 흐릿하던 이 언어의 원리가 갈수록 선명해졌다. 독일어는 규칙이 많은 언어라 처음 익히기에 어렵고 시간이 필요하지만, 원리를 알고 나면 굉장히 체계적이고 확실한 언어였다. 일례로 같은 알파벳도 글자에 따라 다르게 발음되는 영어와 달리, 독일어는 각 알파벳의 발음이 비교적 확실히 정해져 있어 한번 발음을 배우고 나면 대부분의 단어를 읽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영어(미국식)의 경우,


Apple [애플], American [어메리컨], April [에이프릴] 등으로 같은 A의 발음이 다르다.


그러나 독일어의 경우,


Apfel [압펠], Amerikaner [아메리카나], April [아프릴]으로 A를 보통 모두 [아]로 발음한다.



언젠가 산과 저녁을 먹으러 나온 날이었다. 마포구청에서 망원역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전까지 무심코 지나쳤던 영어 간판들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알파벳 조합으로 이루어진 그 글자들이 시신경을 통해 뇌에 입력되고 입으로 출력되는 순간, 우리의 입에서는 독일어 발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바스킨... 로빈스...(Baskin Robbins)

에디야... 코페...(Ediya Coffee)

지벤... 엘레펜...(7-eleven)


길을 걸으며 간판을 읽는 재미에 빠진 우리는 어딜 가든 알파벳 간판을 독일어로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 가끔 정말로 독일어 단어를 발견하기도 했다. ‘그릭슈바인’이라는 상호명을 자세히 보니 ‘Glücksschwein’이었고, 이는 행운의 돼지라는 뜻이었다. 이전에는 생각 없이 바라보던 텅 빈 글자가 의미를 담은 주머니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분명 존재하고 있었는데 모르던 것들. 새로운 세상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미지의 세계의 존재들이 우리의 세상으로 하나 둘 들어오고 있었다. 






새로운 언어의 세상이 우리에게 열리고 있던 그 시기, 그렇게 열린 문으로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불청객이 함께 들어왔다. 지금까지 경험한 적 없는 새로운 바이러스, 코로나 19라는 그 녀석이. 


1월 말이었던 설 연휴 직전에 우리나라에서 발견되기 시작하던 그 작은 존재는 곧 일상을 파고들어 사람들의 생활을 흔들어 놓았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행사가 우후죽순 취소되고, 하늘길이 막히고, 누군가와 얼굴을 마주하는 모든 일이 공포스러운 일로 인식되었다. 모여서 함께 공부하는 것도 예외일 수 없었다. 


내가 다니던 독일어 학원도 결국 3월부터 모든 오프라인 강좌를 취소했다. 이제 독일어를 조금 이해하게 됐는데, 이제 탄력을 받아서 더 열심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잘 닦인 길을 따라가다 갑자기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낡은 엔진에 기름칠을 오래 해서 겨우 시동이 걸렸는데, 몇 미터 가지 않아서 갑자기 멈춰버린 차에 탄 것 같았다. 


큰일이었다. 돈을 써서 강제성을 만들지 않으면, 일주일에 한 번 가야 하는 학원이 없으면 스스로 공부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걸 우리 둘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독일어 공부를 포기하면 독일행도 찰나의 꿈으로 남겨두고, 다시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를 무시하며 현실에 안주하게 될 것이었다.


평소 부정의 아이콘이지만 위기 상황에서 오히려 스트레스에 파묻히지 않고 살기 위해 긍정회로를 돌리는 나는 생각했다. 당장 오프라인 강좌가 폐쇄되었지만, 늦어도 한두 달 후에는 재개될 거라고. 서울 한복판에 임대료를 내려면 공간을 활용해야지. 언제까지 닫아둘 리가 없잖아? 그동안 진도 나가기에 급급해서 배운 내용을 소화할 시간이 없었으니까 차라리 잘 됐어. 쉬면서 배운 내용을 다시 복습하고 기초를 탄탄히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거야. 이대로 진도만 더 나가면 힘들어지기만 할 테니 꼼꼼하게 볼 수 있는 복습의 시간을 가지자. 두 달 동안 바빴으니까 좀 쉬기도 하고.


그렇게 당하고도 또 스스로를 ‘내가 시간이 없어서 못 하지, 시간이 많으면 할 수 있다.’고 믿어버리는 나였다.




*<알파벳도 모르던 제2외국어 공부기>는 매주 화, 목, 토요일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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