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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arn Nov 30. 2023

체호프처럼

#04. Likewise

어제와 같던 어느 날. 독고희는 집 밖을 나섰다. 한 손에는 노트북이 든 커다란 가방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경량 우산을 쥐었다. 목적지가 어딘지는 알 수 없지만 딱 붙는 무릎길이 스커트에 얇은 자켓을 걸쳐 평소보다 깔끔하게 차려입었다. 앞코가 뾰족하고 발등이 드러나는 가죽 구두는 10년째 그녀가 가장 아끼는 신발 중 하나다. 마침 날이 좋아 가까운 지하철 역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집 앞 골목을 나서는데 얼마 전 올라선 대형 오피스텔 유리창에 비친 모습이 나쁘지 않다. 동네 슈퍼 직원이 야채를 잔뜩 실은 카트를 밀며 독고희 옆을 스쳐 지나간다. 지하철 역으로 향하는 골목길 김밥집에는 언제나 외국인이 많다. 독고희는 젓가락질이 능숙한 외국인을 볼 때마다 한국말도 젓가락질만큼 잘하는 사람일지 궁금했다. 오른쪽 어깨에 걸친 가방이 무거운 거 말고는 어제와 똑같은 하루다. 독고희가 사는 곳은 번화가 근처지만 아직은 사람냄새가 나는 빌라촌이다. 이웃끼리 가족처럼 지내는 친근함과 적당히 거리를 두고 상대를 배려하는 매너가 섞여있다. 그래서인지 이 동네는 지하철 역까지 가는 길도 두 종류다. 깔끔하고 편편한 포장길과 벽돌 틈새마다 잡초가 자라 있는 보도블록길을 모두 지나야 차도가 나타난다. 독고희의 집에서 지하철 역으로 가는 길은 포장길로 시작해 보도블록 길로 이어지는데 신기하게도 길과 동네 분위기가 정반대다. 사람 사는 동네 느낌이 물씬 나는 그녀 집 근처는 멀끔한 포장길이지만, 골목을 벗어나 번화가로 진입하면 갑자기 울퉁불퉁한 보도블록길이 나타난다. 독고희는 지하철 역으로 향하는 그 길이 이 동네를 상징하는 풍경이라 생각했다.


 큰길로 나선 독고희는 반대편 지하철 입구로 들어가기 위해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렸다.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어 길을 건너려고 발을 뻗는데 갑자기 몸이 휘청하더니 순간 몸의 중심이 무너지면서 한쪽 신발이 벗겨졌다. 그녀가 바닥에 쓰러지면서 반쯤 열려있던 가방 속 짐도 바닥으로 함께 쏟아졌다. 길 건너는 사람들은 주저앉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무심히 곁을 지나갔다. 당황한 그녀가 떨어진 짐을 주워 담으며 쓰러진 자리로 돌아가자 벽돌 틈에 꽉 끼어있는 구두가 보였다. 독고희는 반대편 손으로 벽돌 틈에서 구두를 뽑으려 했지만 작은 틈 사이에 꽉 끼어 쉽게 빠지지 않았다. 횡단보도의 파란불이 깜빡이며 재촉하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독고희는 어깨에 멨던 무거운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양손으로 구두를 잡았다. 있는 힘을 다해 잡아당기자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면서 벽돌 사이에 박혔던 구두가 무 뽑히듯 한 번에 빠졌다. 신호등은 더 빠르게 깜빡이며 카운트다운을 시작했고 그녀는 구두 상태를 확인할 틈도 없이 서둘러 한쪽을 신고 정신없이 횡단보도를 건넜다. 다행히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기 직전 건너편에 도착했고, 독고희는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빗어 넘기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다행히 그녀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겉으로 보기에 구두는 멀쩡했다. 그녀는 다시 허리를 곧게 펴고 무거운 가방을 고쳐 맨 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지하철 입구로 향했다.


 독고희의 집 앞에 새로 생긴 지하철 역은 포장길처럼 넓고 쾌적했다. 바닥은 언제나 반짝반짝 윤이 났고 개찰구까지 가는 길이 런웨이처럼 길었다. 지하철 역에 들어서는 입구도 센서가 달린 자동문이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 자동문 앞에 서자 자동문이 그녀를 반기며 지체 없이 활짝 열렸다. 출근 시간이 지난 역내는 한산했다. 독고희는 인적 없는 역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순간 바닥과 쇠가 부딪히는 파열음이 나더니 넓고 천장이 높은 역사 안에 소리가 울리며 확성기를 단것처럼 저 멀리 퍼져나갔다. 놀란 독고희가 자동문을 피해 다시 한걸음을 내딛자 '딱!!' 소리가 연달아 더 크게 울려 퍼졌다. 파열음은 독고희의 구두에서 나는 소리였다. 오른쪽 발을 들어 뒤집어보자 아까 블록에 낀 구두 캡이 벗겨져 쇠로 된 굽이 훤히 드러나있었다. 하필 역 바닥이 매끄러운 대리석이라 그녀가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파열음 소리는 더 커졌다. 독고희는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어깨를 움츠렸다. 마치 연극 무대에 처음 등장하는 주인공처럼 혼자만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있었다. 요란하게 자기 존재감을 과시하는 거 같아 얼굴이 후끈거렸다. 소리를 줄이기 위해 한쪽 발에 힘을 주고 조심스레 디뎌봐도 소용없었다. 구두 굽의 파열음 때문에 괜히 다른 발을 디디는 소리까지 크게 느껴졌다. '딱! - 쿵 - 딱! - 쿵 - 딱딱 - 쿵' 개찰구에 카드 찍는 소리까지 더해진다. '딱 - 쿵', '삑', '딱 - 쿵', '딱 - 쿵', 개찰구 너머로 들어오자 사람이 많아졌다. 슬슬 독고희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사람이 생겨났다. 그녀는 시선을 피해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딱! - 쿵 - 딱!! - 쿵', '딱! - 쿵 - 딱!! - 쿵', '딱! - 쿵 - 딱!! - 쿵' 독고희의 발걸음이 빨라질수록 소리가 더욱 커졌다. 지하철 역 안으로 내려오자 한 학생이 드럼 스틱을 들고 대기 의자에 앉아 있었다. 구두굽 소리와 함께 학생이 그녀를 쳐다본다. 독고희는 최대한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려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딱! - 쿵 - 딱!! - 쿵', '딱!!!- 쿵' '딱 - 쿵' '쿵 - 딱딱' 대기 의자에 앉아있던 학생은 쓰고 있던 헤드셋을 벗고 홀린 듯이 독고희의 뒤를 쫓는다. '딱! - 쿵 - 딱!! - 쿵', '딱!!!- 쿵' '딱 - 쿵' 학생이 가방에서 드럼 스틱을 꺼내 허벅지 옆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퍽', '딱! - 쿵 - 딱!! - 쿵', '퍽', '딱! - 쿵 - 딱!! - 쿵', '퍽' 배차 시간이 긴 역 안은 고요했다. 두 사람이 내는 파열음만 천장까지 올라갔다가 공기 중에 흩어져 다시 내려온다. 두 사람의 리듬은 점점 더 절묘하게 맞아 들어 하나의 가락이 되어가고 있었다. ‘퍽-딱!-쿵-딱!!-쿵’ 독고희는 사색이 되어 드럼스틱을 든 학생과 거리를 두려고 더 빨리 걷기 시작했다. ‘딱쿵딱쿵, 딱쿵딱쿵, 딱딱쿵딱쿵’ 하지만 드럼스틱을 든 학생은 이미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그녀는 안중에도 없이 리듬에만 귀를 기울였다. 그녀의 걸음이 빨라지자 학생이 양손에 드럼 스틱을 들고 더 빠르게 리듬을 얹기 시작했다. 딱쿵(퍽)딱쿵 - 딱쿵(퍽)딱쿵 - 딱쿵(퍽)딱쿵. 학생은 흥에 겨운지 자기도 모르게 한쪽 드럼 스틱으로 큰소리가 나게 벽을 쳤다. 딱쿵(퍽) - (깡!!) - 딱쿵 - 딱쿵(퍽)딱쿵 - (깡!!) - 딱쿵(퍽)딱쿵 - 딱쿵.


“저기요!”


참다못한 독고희가 뒤 돌아 남자에게 소리쳤다. 당황한 학생은 멈춰 서더니 등뒤로 어설프게 드럼스틱을 숨겼다. 독고희는 금방이라도 울 거 같았다. “도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정신이 돌아온 학생은 연신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지만 이미 두 사람은 역사 안 모든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독고희가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었다. 마침 역 안으로 열차가 들어와 독고희는 도망치듯이 지하철 안으로 들어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함께 지하철을 탔다. 마침 딱 한자리가 비어 그녀는 자리에 앉았다. 차례로 지하철 안에 들어온 승객들이 각자 자기 손잡이 앞에 섰다. 드럼 스틱을 든 남자는 출입문 근처에 기대 서서 다시 헤드폰을 고쳐 쓰고 있었다. 독고희는 겨우 마음을 진정하고 역에서 내리면 바로 구두를 수선해야겠다 생각했다.


날이 쌀쌀해져 사람들은 대부분 어두운 외투를 입고 있었다. 어깨를 한껏 움츠린 모습이 다들 피곤해 보였다. 지하철 안은 조금 전 독고희가 겪은 소동과는 달리 옆사람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그녀는 이제야 안심하고 출입구에 기대 있는 학생을 슬며시 바라봤다. 학생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휴대폰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독고희는 내리는 역은 사람이 많으니까 구두 소리가 나도 눈에 덜 띌 거라 생각하며 휴대폰으로 구두 수선집을 찾기 시작했다. 지하철이 다음 역에 멈추고 문이 열렸다, 닫혔다. 아무도 타지 않았고 지하철 안은 수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독고희도 역 안의 침묵이 슬슬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다들 누군가 이 적막을 깨주길 기다리는 거 같았다.


그리고 시작은 50대 아저씨의 기침소리였다. "케헤헤헤헤헤게, 켁켁켁켘켘" 사례가 들렸는지 아저씨의 기침소리는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지하철이 지상으로 올라가면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덜컹-덜컹", "덜컹-덜컹", 차체가 한쪽으로 기우는 미세한 굉음도 들렸다 "삑-----" "덜컹' "삑----" "덜컹" "케헤헤헤헤헥" "덜컹" "덜컹" 때마침 다음역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나오려는데 뭔가 고장이 났는지 치직거리는 소리만 규칙적으로 흘러나왔다. "치칙츠--치칙츠--치칙치칙츠츠--" 그때 열차 안에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너무 크게 울리는 바람에 모든 사람이 독고희 옆자리에 있는 할머니를 바라봤다. 하지만 할머니는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가방에서 천천히 핸드폰을 찾았다. 공영방송 인트로 같은 지루하고 밝은 노래가 계속해서 반복재생됐다. 드디어 핸드폰을 찾은 할머니는 좀 전까지 시끄러웠던 벨소리와는 달리 개미만 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어", "어어", "아이구야" 할머니의 친구거나 딸 같은 누군가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고 할머니는 모스부호처럼 반응했다. "어" "아이구야" "그래" "어어" 할머니의 대꾸가 패턴이 되어갈 때쯤 문가에 기대고 있던 드럼 스틱을 든 학생의 눈이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케헤헤헤헤헤헥" "덜컹-덜컹" "삑----" "아이구야" "그래" 치칙츠-치치치칙츠" "어" "어어" "덜컹" "덜컹" "케헤헤헤헤헥" 열차 안의 사람들도 이 묘한 리듬을 느끼고 있었다. 몇몇 사람은 이미 기대에 찬 눈빛으로 드럼스틱을 든 학생을 바라보기도 했다. 학생은 다시 한번 드럼 스틱을 손에 쥐고는 할머니의 입모양을 뚫어져라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이구야" "탁탁" "삑----" "덜컹" "덜컹" "그래" "치칙츠-(딱)-치칙츠-(딱)-치치치치치칙츠" "덜컹" "우야노" "덜컹-덜컹" 마침 잦아든 아저씨의 기침소리를 드럼스틱을 든 학생은 완벽하게 채워줬다. 자기도 모르게 지하철 손잡이를 두드리는 사람도 생겨났다. "그래" "덜컹-덜컹" "탓타타탁" "덜컹" "덜컹" "삑----" "치칙츠-(딱)-치칙츠-(딱)-치치치치치칙츠" "아이구야" "탓타타타탁" "덜컹" "덜컹" "삑----" "어어" "(탁)타타탓탁" 열차가 다음 정거장을 향해 속도를 내면서 리듬도 점점 빨라졌다. "어" "(탁)타타탓탁" "덜컹" "삑----" "치칙츠(딱)-치칙츠(딱)" "우야노" "덜컹" "덜컹" 그리고 드디어 고장 난 안내 방송이 켜지면서 흥겨운 가락이 나오기 시작했다. "빠라라빠라라 빠라라라" "덜컹" "덜컹" "어어" "덜컹" 드디어 이 합주가 끝이 나려는 순간 드럼스틱을 쥔 학생이 갑자기 독고희를 바라봤다. "빠라라 빠라라" "그래" "탓타타타탁" "탓타타탁" "삑----" 학생뿐만 아니라 손잡이를 두들기던 승객도, 숨죽여 이 리듬에 집중하던 지하철 안 모든 사람이 그녀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있었다. "빠라라" "덜컹" (탁)타타탓탁" "삑---" "그래" "덜컹-덜컹" "어어" "어어" "그래" "탁타탓" "탁타탓" "삑---" "탓타탓" "탁타탓" "케헤헤헤헤헥" "폭폭폭폭" "알았다" "폭폭폭" "탁타탓" 리듬이 점점 고조됐고 사람들의 시선을 견디다 못한 독고희는 쇠가 드러난 구두 굽을 세게 내려쳤다.


"캉!!!!!!"


그녀가 서늘한 마찰음을 내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할머니는 전화를 끊고, 열차는 멈추고, 안내 방송은 끝난 채 지하철 문이 열렸다. 드림스틱을 쥔 학생은 너무나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독고희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녀는 바라던걸 얻고 후련해하는 사람들을 어이없이 바라보다가 이번 역이 내릴 곳이라는 걸 깨닫고 밀려 들어오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나가며 소리쳤다. "내릴게요!!!!!" "딱-쿵" "딱-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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