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경매회사와 아트페어
럭셔리 자동차 브랜드, 롤스로이스는 지난해 최고 실적을 거뒀습니다. 총 6,021대의 차를 팔았죠. 롤스로이스의 118년 역사상 1년간 6천대 이상의 차를 판매한 건 처음이라고 합니다. 이 소식을 가장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건, 미술계였습니다. 글로벌 경제 상황이 악화하고 있음에도, 최상위권 부자들의 씀씀이는 줄지 않았다는 지표였기 때문이죠. 미술시장은 소수 부자들의 구매로 시장이 유지되고, 이들의 구매는 경기 상황에 큰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이런 흐름 속 명확한 수치가 드러나니, 미술계는 반색을 표했죠. 아트뉴스 Artnews는 "올해 미술시장도 괜찮을 것 같다"라고 분석했습니다.
실제로 작년 해외 미술시장은 좋은 성과를 냈습니다. 매출과 출품작, 낙찰률 모두 떨어진 국내 경매회사와 달리, 해외 경매회사는 역대 최대 매출을 기록했죠. 3대 경매회사라 손꼽히는 크리스티는 한화 약 11조 원, 소더비는 10조 4천억 원, 필립스는 1조 7천억 원의 실적을 발표했습니다.
그렇다면 해외 미술시장은 어떻게 경제상황과 상관없이, 높은 매출을 낼 수 있었을까요? 그들은 경제 위기 상황에서 최상위 부자들에 마냥 의존하지 않았습니다. 전략을 다변화하며 매출을 증대시켰죠.
국내와 달리 해외 경매회사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는 이벤트가 있습니다. 소위 '큰손'이라 불리는 컬렉터의 컬렉션 경매. 이전에 록펠러 컬렉션이 있었고, 최근에는 미국 부동산 갑부로 꼽히는 맥클로 컬렉션이 있었습니다.
지난 11월에는 마이크로소프트 공동 창업자인 폴 앨런의 컬렉션이 크리스티에서 열렸습니다. 그리고 이 컬렉션 경매로 크리스티는 2조 1100억 원의 매출을 올렸죠. 개인 컬렉션 판매 사상 최고치입니다. 록펠러 컬렉션은 1조 405억 원(2018년), 맥클로 컬렉션은 1조 1725억 원(2022년)이었습니다.
소더비 역시 개인 컬렉션 경매를 진행했습니다. 데이비드 M 컬렉션을 비롯, 솔린저, 조셉 호퉁 컬렉션이 각각 1200억 원 이상의 수익을 올렸죠. 이런 개인 컬렉션 경매는 유명인이 소장했다는 후광효과를 얻을 수 있어, 높은 금액대에 작품이 거래되곤 합니다. 또 대부분의 수익금을 사회에 환원하기 때문에 작품 구매 명분도 좋은 편이죠.
하지만 컬렉터의 작품 판매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해외 시장 특성상, 개인 컬렉션 판매가 잦은 일은 아닙니다. 때문에 이런 컬렉션 경매는 옥션 입장에서 안정적인 전략은 아니죠.
때문에 해외 경매회사에서는 미술품 외 경매를 늘렸습니다. 고급 보석, 가방, 시계, 술 판매 등이 그 사례죠. 이에 대한 비판도 많습니다. 미술품 경매 비중이 줄어들었는데, 사상 최대 실적이라 이야기 하는 것은 눈속임이 아니냐는 겁니다.
하지만 코로나19 때 대폭 증가한 미술품에 대한 관심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매출을 다변화한 것은 안정성을 위한 조치였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변동성이 커진 상황에서, 굳이 미술품에만 매달리는 것은 기업의 안정적 성장을 위해 적절하진 않죠.
실제로 소더비의 올해 매출 10조 4천억 원 중, 미술품은 전년대비 7% 감소한 수치를 보였습니다(약 8조 원). 하지만 최근 인수한 자동차 경매사인 RM소더비와 부동산을 거래하는 컨시어지 옥션에서 약 2조 9천억 원의 수익을 내며 매출 규모가 커졌습니다.
크리스티도 마찬가지입니다. 올해 매출 11조 원 중, 보석, 가방, 시계 등을 거래하는 럭셔리 부문이 1조 2천억 원의 수익을 냈습니다. 럭셔리 부문은 미술품보다 객관적인 가치 판단이 가능하다는 인식 때문에, 경매 입문 통로 역할을 하곤 합니다. 크리스티는 작년 전체 신규 고객의 36%를 럭셔리 경매를 통해 유치했죠. 미술품 외 경매가 기업 안정성을 위한 좋은 전략임이 드러난 겁니다.
크리스티가 럭셔리로 신규 고객을 유치했다면, 필립스는 MZ 세대 컬렉터를 대거 유입했습니다. 필립스는 3대 경매회사 중 가장 규모가 작지만, 2021년 창립 이후 최고 매출(1조 5천억 원)을 낸 데 이어 2022년에는 1조 6천억 원의 매출을 기록했습니다. 크리스티나 소더비와 달리, 미술품 경매로만 매출의 대부분을 달성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죠.
필립스의 전략은 조금 달랐습니다. 코로나 시기 미술시장 새로운 큰손으로 떠오른 MZ세대를 타게팅했죠. 작년 경매 구매자의 47%가 신규고객이었고, 이들 중 30% 이상이 밀레니얼 세대였습니다. 필립스가 코로나 상황이 종식되어 가는 상황에서도 꾸준히 온라인, 라이브 경매를 진행하며 밀레니얼을 놓지 않은 덕분입니다.
소위 말하는 블루칩, 초고가 작품은 시장상황의 영향을 잘 받지 않습니다. 롤스로이스 판매 실적으로 볼 수 있듯, '최상위 부자'들의 씀씀이는 쉽게 줄지 않기 때문이죠. 하지만 '평범한 부자'가 주 고객인 대중적인 작품 거래 시장은 불황에 취약합니다. 이들은 시장 상황에 따라 포트폴리오를 쉽게 수정하죠. 불황 때마다 미술시장에 빈익빈 부익부, 양극화가 찾아오는 이유입니다.
경매회사는 대부분 초고가 작품이 거래되기에 전략이 통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중 작품 거래가 많은 아트페어에서는 취약함이 드러났습니다. 작년 10월에는 세계 3대 아트페어로 손꼽히던 FIAC이 바젤 아트페어에 밀려 개최를 잠정 중단했습니다. 또 '마스터피스 런던'은 물가 상승과 업황 악화로 올해부터 개최가 잠정 중단되었고요. 마스터피스 런던의 주최사인 MCH그룹은 세계 최대 전시업체라 불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 상황에 위축된 전략을 취한 것이죠. 업계에서는 '아트페어 구조조정 시즌'이 찾아왔다 봅니다. 강자는 살아남고, 약자는 사라지고 있죠.
전문가들은 코로나19로 시작된 양적 완화로 미술시장이 최근 2년간 폭발적 성장을 보였지만, 금리인상으로 유동성이 축소되면서 시장이 조정기에 들어갈 수 밖에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대표적인 투자수단인 부동산과 주식은 물론이고, MZ 컬렉터 유입에 공을 세운 가상화폐 시장까지 축소되며 미술시장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죠.
세계 3대 경매회사의 작년 성과는 언뜻 시장 흐름에 역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문가들은 이런 흐름도 2023년에 접어들며 성장세가 꺾일 것이라 분석합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내년 미술시장의 추이를 지켜보아야 한다고 예상했습니다. 미술시장이 아무리 초고가 작품 위주로 흘러가는 시장이라 할지라도, 필연적으로 찾아올 조정기에 대한 대비는 필요한 시점입니다.
✍ 해외 미술시장에 대한 글을 흥미롭게 읽었다면, 최근 국내 미술시장 흐름을 다룬 글도 읽어보시길 추천드려요. 초고가 미술시장을 이끌어가는 컬렉터들의 컬렉팅 이유와 방식도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