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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가적일상추구 Feb 23. 2024

프란츠 카프카- 변신(줄거리 포함 해석)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살펴보기

30대 초중반 나에겐 숙제 같은 작가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프란츠 카프카였다.

읽어도 읽어도 그 의중을 파악하기 어려웠던 그의 작품들.

'소송', '변신', '심판', '실종자' 그리고 그의 마지막 미완성 장편인 '성'까지 읽고 또 읽었지만 사실 그의 작품들을 온전히 내 것으로 소화했다고 하기엔 무언가 미심쩍은 의문들이 마음속 깊은 곳에 서려있었다.

확실히 그의 작품을 소설적 재미를 느끼기 위해 읽는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시 말해 플롯 자체로 느껴지는 즐거움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아니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주인공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치는 일들이 물 없이 먹는 고구마처럼 답답함을 느끼기에 안성맞춤이다.


그래서 이제 40대가 저물어가는 즈음 다시금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을 소환해 내어 천천히 읽어보기로 한다.

프란츠 카프카(1883.07.03~1924.6.3)

우선 그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방랑자 같은 삶을 살았다.

백정의 아들로 태어나 지금의 체코 프라하에서 성공한 상인의 삶을 살았던 그의 아버지 헤어만 카프카(1852~1931)는 아들이 셋 있었지만 둘은 죽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프란츠 카프카가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왕국의 권력층인 독일계 사회에 집입하기를 바라 마지않았다.

보헤미안 제국의 유대인의 정체성이 있는 카프카는 독일어로 공부를 하며 결국 프라하 대학의 독일어 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게 된다. 이 또한 아버지의 뜻으로 문학을 하고 싶었던 카프카에게 그런 아버지의 존재는 거대한 벽이요 부조리한 세상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에게 늘 원했던 하나는 작가로서의 삶을 오롯이 누리는 것뿐이었으나 현실은 녹녹치 않았다.

아버지가 원한 길을 가지 않았기에 경제적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폐결핵 진단까지 받아 아픈 몸을 이끌고 경제적 활동과 작가의 삶을 사는 것이 힘에 부쳤던 카프카는 세 번의 약혼과 세 번의 파혼을 겪는 등 그의 삶은 많은 부침이 있었다.


또한 그가 살았던 시대의 모습은 어떠한가?

자본주의의 폐해가 극에 달했던 시대로 세계 1차 대전을 직접 목도했을 뿐 아니라 그의 조국 보헤미안 왕국 역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왕국에 병합되어 그 휘몰아치던 파고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여담이지만 프란츠 카프카의 여동생들이 2차대전 독일의 유대인 홀로코스트에 희생되었던 점을 감안하면 당시 무명작가에 병든 몸으로 당시까지 살아있더라면 역사의 희생양이 되지 않았다고 장담하기 힘든 상황에 직면했을 것이다.


이를 종합해 보면 아버지의 가부장적인 권위를 넘어서는 지나간 간섭, 자신이 하고자 했던 일인 문학에 대한 열정과 생계, 자본주의사회의 여러 가지 폐해가 극단으로 치닫던 때, 보헤미안 왕국의 유대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뒤로하고 평생을 독일어로 생각하고 글을 쓴 자신, 유대교도 기독교인도 아니었던 종교관으로 당시 주류사회에 주변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현실, 유복한 어린 시절과 다르게 병약한 몸으로 생계를 책임 지어야 했던 자신, 결혼을 하게 되면 가장이라는 책임감에 문학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게 될까 하는 불안감 등등이 프란츠 카프카를 괴롭혔을 것이고 그런 마음의 카프카를 이해하고 읽어본 소설 '변신'은 확실히 과거와는 다르게 다가왔다.

 어느 날 프라하 상점의 영업사원(당시로는 상당히 괜찮은 직업이었던 것 같다)인 그레고리는 새벽 5시 기차로 출장을 가기 위해 역으로 갔어야 하지만 왠지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이내 잠에서 완전히 깨어 바라본 자신의 모습은 거대한 벌레로 바뀌어 있었다.

상점의 지배인이 와서 자초지종을 알려고 하였으나 그와 그의 가족은 벌레로 변해버린 그를 보여줄 수 없어 이런저런 핑계를 대어 그가 인간 그레고리로 돌아왔을 때 그 좋은 직장에 다시금 다닐 수 있게 하려 했으나 그의 모습을 본 지배인은 혼비백산하여 달아난다.


기실 그레고리는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인하여 어린 시절부터 그 상점에 사환으로 들어가 공부를 하여 상과 대학을 졸업하고 보병 장교를 다녀오는 등 성공적인 삶을 살아 나이 든 부모와 어린 동생을 건사하고 있었던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 그런 그레고리는 없고 한 마리 거대한 벌레가 되어 그가 좋아하던 신선한 유우 대신 상한 채소나 오래된 치즈가 당기는 존재가 되었다.

그레고리는 벌레가 된 순간 이제는 나이 들어 제 몸조차 가누기 힘든 부모님과 16살의 어린 동생의 생계를 걱정했고 가족들 역시 자신들의 생계를 책임지었던 아들과 오빠에 대한 고마움과 걱정으로 힘들어했다.


시간이 점점 흐르며 그레고리가 벌레가 되었다는 현실을 인지하고 가족들은 저마다 생계를 위해 일을 하기 시작한다. 아버지는 은행의 사환으로, 어머니는 삯바느질, 여동생은 점원으로 일하기 시작한다.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그리고 옆방이었던 동생의 방을 낯선 세 남자에게 세를 놓기도 하는 등 점차 현실에 적응과 안주를 하게 되고 이내 벌레인 그레고리를 증오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변해버린 현실에 고민하던 그레고리는 죽어버리게 되고 그의 죽음은 가족들에게는 감사 기도를 드리는 기쁜 일로 받아들여지며 소설은 씁쓸한 결말을 맞이한다.

이 소설을 읽은 지금의 나에게 다가오는 것은 하이데거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현존재(인간)의 비본래적 실존이라는 것이 이토록 비극적인가!'이다.


작품의 모티프가 되는 작가 프란츠 카프카의 삶을 보더라도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아들로서의 자신, 또 결혼을 하여 가장의 역할을 하게 될 자신 그렇게 특정 지어지는 그 무엇의 존재는 주위 사람들에게 목적론적으로 존재의 가치가 있을지언정 자기 자신을 위해 생각해 보건대 그런 존재는 좌절스러운 비극의 존재일 수밖에 없다. 또한 그것조차 각성하지 못한 세계-내-존재로서 타인의 관점에서 비본래적으로 존재하는 현존재의 존재는 그야말로 소설 속에 등장하는 벌레 그 자체일 것이다.


소설 '변신' 속의 그레고리. 벌레가 되기 전에 가족을 부양하는 멋진 아들이요, 오빠였지만 벌레가 된 이후로는 말 그대로 벌레가 되어 가족의 앞날을 암울하게 만든 존재가 되었다.

벌레로 변해 버린 아들, 오빠인 그레고리는 그들에게 도구성이 사라진 세계-내 한낱 존재자에 불과한 것이었다. 제 역할을 못하는 인간을 지칭하여 2024년의 대한민국에서도 그들을 벌레라고 칭한다.(~충의 전성시대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충이 만연하며 또 다른 ~충의 등장은 매일매일 이루어지고 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은 이 세상에 우연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오죽하면 폴 샤르트르는 우리를 그냥 이 세상에 아무 이유 없이 내던져진 존재라 칭하였을까? 그런 세상에서 아무렇게 살아 간도 해도 살아가면 살아지는 것이 인간의 삶이며 이를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자면 비본래적 현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런 비본래적 현존재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모른 채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각성 없이 그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며 살아갈 뿐이다. 세계-내-존재로의 현존재는 실존의 벽을 넘는 사유를 통해 죽음을 인식하고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아 힘들지만 의미 있는 전진을 통해 아무런 두려움 없이 삶을 살아가고 마무리 지을 수 있다고 했다. 소설 속 벌레가 된 그레고리는 애초 인간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도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가 가족을 사랑하고 국가에 충성했다 하더라도 인간 실존에 대한 개시와 그에 따른 행위가 뒤따르지 않았다면 그는 진정한 삶을 산 것이 아닌 모두를 기만한 비본래적 인간으로의 존재로 끝나는 비극적 운명을 비껴갈 수 없는 존재이다. 극단적으로 인간이 아닌 그저 수많은 벌레 같은 대중 속에 하나의 벌레일 뿐이었다. 이 부조리함을 프란츠 카프카가 중편소설 '변신'을 통해 기가 막히게 엮어 낸 것이다.


도구성으로 점철 지어진 우리 모두의 삶. 아무리 우리가 그것이 진정한 삶이라 해도 그것은 수많은 나사와 볼트 같은 도구적 삶의 파편일 뿐이다. 프란츠 카프카가 본질 지어진 삶을 마다하고 끝까지 자신만의 삶을 고집했다는 점에서 그는 진정한 본래적 존재였다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이 소설의 집필 의도 또한 그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죽은 지 100년이 다 되어가도 그리 많이 바뀌지는 않는 것 같다.

아니 타인의 삶이 SNS를 통해 더욱더 각인되는 환경에서 모두가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사진 속 모델로 퇴락되어 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본래적 존재는 이제 먼 도인의 이미지가 되어가고 있다.


오늘을 살아가며 나의 실존과 그 반대되는 역할 또는 의무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을 해보며 너무 인간적이지도(?) 너무 벌레 같지도 않은(?) 중도적인 삶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 된다.(마르틴 하이데거는 인간 실존에 대한 각성을 통해 본래적 삶을 살수 있다고 하는데 그런 삶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설명하진 않았지만 아마도 예수의 사랑이나 부처의 자비를 어떤 목적이나 도구적으로 행하지 않고 순수하게 실천하며 살아가는 그런 고귀한 삶이 아닐까 한다.)


이상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살펴본 프란츠 카프카의 중편소설'변신'이었다.

프라하 유대인 공동묘지에 있는 프란츠 카프카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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