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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ther K Dec 30. 2019

보라카이를 포기하고, 세부에 머물다

태풍 판폰이 바꾼 크리스마스 여행

기상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뉴스를 틀어놨다. 강력한 바람과 처참하게 쓰러진 집들이 눈에 들어왔다. 태풍 판폰이 보라카이를 강타했다는 소식과 함께 필리핀의 다른 피해지역도 보여준다. 20여 명이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수없이 많은 이재민이 발생했다고 한다. 걱정 어린 눈으로 지켜보다가 이내 잠이 든 모양이다. 아침 비행기 탄다고 서두른 탓에 새벽 3~4시경 일어나서 여태 긴장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여전히 공항 폐쇄인가요? 하루 더 여기 있으라고요?

밤 12시경 전화벨이 울렸다. 항공사 직원이 각 호실마다 전화로 설명을 해주나 보다. 여전히 칼리보 공항은 폐쇄이므로 비행기가 뜨지 못한다는 소식과 함께 하루 더 지금 있는 호텔에 머물러야 한다고 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 알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는다.

잠이 확 달아난다. 얼마나 태풍이 강한지 필리핀의 메인 통신사 Globe와 Smart 중에서 Globe는 통신두절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Smart의 유심은 동이 나서 구입할 수도 없었다. 그 때문인지 호텔 안의 통신 상태도 말이 아니다. 고민 끝에 로밍을 신청하고 다시 생각에 잠긴다. 그렇게 또 하루를 보낼 수 없다. 어떻게 시간을 내서 온 크리스마스 휴가/여행인데, 벌써 절반 가까이 지나가 버린 것이다. 

검색을 하고, 로비에서 얻어온 맵으로 시티투어 장소를 살펴본다. 바닷가가 멀지 않다는데, 그 흔한 호핑투어를 할 것인지 시티투어를 할 것인지 고민한다. 현지는 물에 잠기고 사람들이 어려움에 빠져 있는데, 여행 스케줄을 고민하는 내가 한심해 보일 수도 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혹시 하루 더 연장되면 호핑투어를 하기로 하고 날이 밝으면 시내 관광을 하기로 한다. 


여기에도 대항해 시대의 잔해가 남아있다

대항해 시대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 정복은 남미에나 영향을 미치는 이야기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곳은 마젤란이 발견했고, 역시 처절한 원주민과의 싸움이 있었던 모양이다. 앞장서서 싸웠던 장군의 동상과 격전지였던 요새, 그들을 통해 전해진 천주교의 교회와 십자가를 찾아 나선다. 그래서였나 보다. 필리핀 현지어의 단어 중간중간 스페인어 단어들이 귀에 들어왔다. 외래어로 정착되어 남아 있는 모양이다. 현재는 천주교가 국교이고, 이들의 언어까지 스페인어가 담겨 있는 것을 보면 '발견', '대항해', '식민지 개척'이 과연 누구의 시선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인지 깊은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바로 앞뒤로 자리잡고 있는 원주민 추장 동상과 스페인 추모탑  (왼쪽) 스페인 세력에 맞서 싸웠던 원주민 추장 '라푸라푸'의 동상 (오른쪽) 스페인 사상자를 위한 추모탑

외세 침략에 맞서기 위한 요새 (왼쪽) 산 페드로 요새의 입구 (가운데) 포가 위치하고 있어 격전을 상상하게 한다 (오른쪽) 외세에 항거한 사람들의 초상화들


(왼쪽) 마젤란의 십자가 (가운데) 세부 시내의 광장. 미사 공간이 크게 자리잡았는데 크리스마스 장식도 함께 있었다. (오른쪽) 가장 오래된 '산토니뇨' 성당

거리가 멀지 않은데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서 이동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다행히 Grab앱이 되어서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다. 관광지 몇 곳을 들리고, 유적지를 살펴보고, 쇼핑몰을 들려서 그들의 삶을 엿본다. 동남아 국가들의 삶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휘황찬란한 쇼핑몰이 자리 잡고 있는 반면, 가축들과 함께 낙후된 환경에서 사는 빈민가 사람들도 같은 공간에 존재한다. 다리를 하나 건너고 나면 전혀 다른 세상이고, 골목을 하나 돌고 나면 개발 지역과 비개발 지역이 나눠진다. 태풍으로 인해 원하는 목적지를 가지 못해 힘이 빠진 것인지, 이들의 실생활에 마냥 행복한 웃음을 띄울 수 없어 그런 것인지 하늘에도 약간의 구름이 껴 있었다. 


우리 한국에 무사히 돌아갈 수 있겠지?

다행히도 보라카이 호텔과 픽업 서비스 등은 모두 환불이 완료되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현지에서 환불에 응해준 것이었다.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빠른 복구가 되길 소원하는 메시지를 보낸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가 한국에 무사히 돌아가는 것뿐이다. 

보라카이에 가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시작한 하루였다. 가봤자 잠긴 도로, 폐허가 된 그곳에서 신나는 마음이 들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아가는 길도 맘이 편치 않은 것은 한국에서 올 때와 한국으로 돌아갈 때의 항공사가 다르기 때문. 돌아가는 시간대를 편하게 잡다 보니 다른 항공사를 선택해서 예약을 했고, 그 덕분에 보라카이로 들어가서 뜰지도 안 뜰지도 모를 비행기를 기다려야 하는지, 세부에서 바로 인천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또다시 고민에 휩싸인다. 이번 여행은 뭐 하나 쉽게 결정되는 게 없이, 정말 수없이 많은 변수들과 함께 깊은 고민에 빠지게 한다. 쉬려고 왔던 여행인데, 뭐하나 마음 편하게 있을 수가 없구나 싶었다. 독특한 경험으로 넘겨버리기엔 아직도 무사 귀환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하다. 

크리스마스에 태풍 속으로 날아오는 경험.
일생을 살면서 이런 경험을 다시 또 할 수도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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