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과 함께 떠난 보라카이행, 세부만 찍고 돌아오다
다행히도 27일에는 칼리보 공항도 오픈한다고 했다. 보라카이로 가는 것이 의미 없어진 상황에서 옵션은 두 가지였다. 한국으로 돌아갈 것인가? 하루 이틀 여기 더 머물다가 돌아갈 것인가?
하루 이틀 더 머물 수도 있었다. 내일로 미뤄둔 호핑투어를 하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 쇼핑몰에서 현지 유심도 구매했다. 급하게 호텔을 잡는 것도 문제는 아니었다. 도처에 아파트텔이 넘쳐나고 심지어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한 풀 꺾인 '흥'이었다. 또 하나, 며칠간 적체된 사람들이 한꺼번에 빠져나갈 경우, 돌아가는 비행기를 구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또다시 찾아왔다.
그동안 태풍으로 인해 몇 개의 비행기가 더 떴나 보다. 그게 한국에서 온 비행기인지, 필리핀 내부에서 뜬 비행기 인지는 모르지만 연일 사람들이 우르르 로비에 몰려 있는 것을 볼 때, 기상악화로 다들 이곳으로 회항해 왔나 보다 싶었다. 그들이 언제 떠날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집에 가서 편히 쉬고 싶은 생각이 급습해 왔다. 우리는 '안전'을 선택하기로 했다. 다음 날 세부-인천 비행기를 선택했고, 항공사는 리턴 티켓까지 주었다. 사실 리턴 티켓은 다른 항공사여서 걱정이었는데, 다른 항공사는 계획대로 운항한다고 하므로(칼리보 공항 to 인천) 30% 수수료 차감하고 취소 처리했다. 합리적인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다. 저가 항공을 이용할 때는 출발행과 도착행의 항공사가 다른 경우도 많았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약간의 금액 차이가 있더라도 웬만하면 같은 항공사로 예약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것을 배웠다. 돌아가는 비행기도 같은 항공사였다면 100% 환불 처리받았을 테니 말이다.
내일 오후 비행기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시원 섭섭했다. 뭔가 본론을 들어가 보기도 전에 내쳐진 느낌이랄까? 항공사에서 제공해준 석식을 먹고도 뭔가 부족했다. 양과 질의 문제가 아니라 심리적인 공허함 때문이었으리라. 주변에 봐 두었던 야시장 터로 향한다. 크랩이 비싸다면 새우라도 먹고 가잔 생각으로 1킬로를 계산하고 칠리소스를 주문한다.
오늘도 오늘의 태양이 떴다
오늘의 일출은 조금 늦었는지 구름에 가렸다. 하지만 공항으로 향하는 내내 매정하게도 날씨는 너무도 맑고 밝았다. 우리 말고도 바로 한국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20명 남짓. 나머지 분들은 칼리보 공항으로 가시거나 세부에서 며칠 더 묵으신다고 하신다.
각자의 길로 흩어지는 사람들을 보며 내 선택이 맞는 것인지 고민해 보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다음 기회엔 혹 내가 계획하지 않은 여행이라도 좀 더 여유로운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나 자신이 되어 있기를 바란다.
여행이 주는 묘미가 경험에 있다면, 이번 여행은 내 일생의 두 번도 있기 힘든 대단한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코 다시 하고 싶은 경험은 아니다. 무척 다행히도 어려운 고비는 다 비껴가고, 왠지 모를 불안에만 휩싸여 오덜 오덜 떨다가 온 여행이지 않았나 싶다. 이번 기회에 다시 여행의 의미를 생각하게 했다.
여행은 새로운 경험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내가 있는 이 삶이, 이 환경이
얼마나 축복인가를 깨닫게 해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