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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ther K Aug 08. 2020

번아웃 시대를 살아가는 잉여의 자세

조금은 부족해도 괜찮아, 잉여인간으로 잠시 존재해도 괜찮아.

누구에게 칭찬 한마디 들려주지 않는, 바쁘고 바쁜 삶들…

새벽 출근길 차가 막힌다. 태풍이 몰아치던, 홍수로 한강물이 범람하던, 일찍부터 일터로 향하는 차량의 행렬이 즐비하다. 주중에 밤늦도록 야근하고도 출근 전 시간부터 보고가 잡혀 있다. 수도 없는 보고서의 수정, 각종 계획과 목표들이 파워포인트 장표 안에 담겼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주중을 보내고 나서도 주말을 맞이해도 늘 분주하긴 마찬가지다. 자기 계발을 위해 어학을 공부하거나 불안한 현재의 사회생활을 떠올리며 제2의 인생을 어떻게 살까 골몰하며 또다시 어디론가로 향한다. 그렇게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다시 월요일 아침을 맞는다.

나도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맞는 줄 알았다. 끊임없이 가동하고 돌려야지 실적이 나오고 그것으로 평가받는 삶에 익숙해져 있었다. 거세게 흐르는 강물에 힘겹게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올라가지 않으면 심지어 버틸 수도 없고 마치 급류에 휩쓸려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불안하게 뭔가를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다. 

인생을 더 많이 살아보신 분들, 가정을 꾸리신 분들, 더 큰 책임을 지고 살아가시는 분들에 비해 배부른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으나 스스로 언젠가 모르게 만들어 놓은 기준에 적합하지 않으면 스스로를 괴롭히는 삶을 살아보면서 나를 갉아먹고 있는지 알게 된 것은 마흔이 넘어서인 지금쯤 인 듯하다.

생활시간표의 빈 공간이 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고, 꽉 찬 스케줄과 그 스케줄대로 소화해낸 스스로가 대견스러웠는데, 반대급부로 나의 노력을 알아주는 이가 없거나 결과가 예상보다 못 미칠 경우 나락으로 떨어지고 슬럼프에서 허우적거렸다. 그런데, 사회생활을 하는데 누가 칭찬을 들으며, 노력함을 알아주던가? 학창 시절 나를 응원해주고 칭찬해 주는 선생님을 기억하고 추억하는 건 그만큼 그런 일이 드물기 때문이 아닐까? 

이젠 칭찬이라도 들을 때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닌지 낯설어하는 모습을 보며 지칠 대로 지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번아웃 시대의 인간의 모습으로 남아있었다.


생각지 못했던 잉여의 시간 안에서의 자유로움

그러던 중 뜻하지 않게 그동안 그렇게 평가절하했던 잉여의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잠을 자거나, 손가락 관절에 무리가 가도록 핸드폰 게임을 즐기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물가에서 물만 바라본다. 되지도 않는 글도 쓰며, 의미도 없는 티브이를 하루 종일 보기도 한다. 무언가 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특출 난 성과를 내야 한다는 목표에서 벗어나 어떤 결과여도 상관없는, 달성할 그 어떤 목표도 없는 잉여의 시간을 보낸다. 영어 단어를 외우지 않아도 되고, 다른 이들과 비교하여 뒤처진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바람이 솔솔 부는 저녁 산책길을 핸드폰 하나 들고 걷다가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메모장에 남기며 새소리, 물소리, 나의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다 문득 친구 누가 생각하면 전화를 하기도 하고 톡을 남긴다. 잘 지내냐고, 보고 싶다고...

기계가 아닌데 어떻게 24시간 풀로 가동할 수 있을까? 기계도 그렇게 가동하면 고장 나는 데, 해가 뜨고 지는 것에 따라 생활하도록 프로그램된 인간이 어떻게 멀티로 그 많은 일을 달성 불가능할지도 모를 목표를 향해 끝도 없이 내달릴 수 있을까?


나에게 보내는 위로의 한 마디

다 던져버리고 깊은 산속 움막에 들어가기 전에 나를 달래 보자. 괜찮다고, 상당히 쓸만한 인간이고 충분히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스스로에게 따뜻하게 말을 건네 보자. 잠시 잉여의 인간으로 존재해도 좋고, 그렇다고 인생이 무너지는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로해 보자. 

내게도 그런 시간들이 나를 보다 여유롭게 하고, 웃게 하고, 숨을 쉬게 했다. 그런 여유를 주변에서는 기가 막히게 느꼈고, 오히려 더 나를 존중해 주었다. 잉여의 시간이 아무런 힘도 없어 보이지만 사실 그 시간 안에 정말로 많은 것들이 녹아들어 있었던 것이다. 


세포에게서 배우는 인생의 진리

세포도 눈으로 보기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S기’라는 것이 있다. DNA가 2배로 증폭하며 세포분열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가장 오랜 시간이 이에 해당한다. 그렇다. 그렇게 세포 하나하나에도 잉여의 시간이 프로그램되어 있었다. 학창 시절 과학시간에 배웠던 그 사실이 진리로 다가온 요즘, 내게도 잉여의 시간을 준다. 나를 나답게 하는 DNA를 2배로 증폭하는 시간으로 그냥 그 모습 그대로 나를 놓아둔다. 바쁘게 살아가지 않아도, 조금은 부족해도 아니 그 어떤 의미를 담고 있지 않아도 괜찮다. 숨을 쉬고 있고, 새소리를 느낄 수 있는 그 여유라면 이제 기운을 차리고 다시 힘을 낼 수 있을 것이다. 조금은 부족해도 괜찮다. 잠시 잉여인간으로 존재해도 된다. 고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잉여의 시간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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