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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을 요리하다 Aug 20. 2021

[감자] 엄마의 냉장고 테러 극복기

- 된장찌개, 카레, 감자 샐러드


  원래도 부지런했던 울 엄마는 아빠와 이혼하고, 딸을 시집보낸 후 두 배는 더 부지런해졌다. 신기하게도 사주를 보러 가서 엄마 이야길 하면 모두가 하나같이 '일 복을 타고나신 분'이라는 이야기를 했었다. 아 진짜 잘 맞춘다, 역시 조상님들의 빅데이터..!


  아빠도 없이 그 큰 이층 집에 살면서 하루 종일 엄마는 손을 쉬게 두지 않는다. 마당의 잔디를 깎고, 꽃을 기르고, 매일 찾아오는 아기 고양이에게 밥도 주고, 데크에 오일스테인도 칠하고, 뒷산에서 밤도 줍고 - 이렇게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엄마의 일상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텃밭을 가꾸는 일이다.


엄마의 집, 엄마의 왕국


  마당보다 조금 낮은 지대를 평평하게 만들어 엄마는 엄마만의 작은 왕국을 만들었다. 방울토마토와 가지, 상추와 깻잎, 바질, 그리고 호박... 나는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엄마는 뭐가 어디에 얼마만큼 자랐는지 빠삭하게도 꿰고 있다.






  하루는 엄마가 엄마의 큰언니, 그러니까 내게는 큰 이모를 보러 서울에 왔다. 마침 우리 부부가 새 집으로 이사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엄마를 픽업해서 신혼집에 데려오기 위해 이모네에 모시러 갔었다. 그리고, 나는 테러를 당했다. 농작물 테러.


  예상은 했지만, 예상보다 더 심각한 테러였다. 엄마의 아담한 텃밭에서 온 것 치고는 양이 상당히 많았던 상추랑 호박이랑 깻잎, 엄마가 어디서 구해다 준 감자, 양파, 그리고 엄마가 고이고이 기른 바질, 엄마가 만든 김치, 엄마네 언니가 준 오이- 트렁크는 순식간에 식량으로 가득 찼다. 엄마, 우리 집은 엄마 집처럼 냉장고가 크지 않단 말이에요, 나의 다급한 외침은 엄마네 자매에게 처참히 묵살당했다.


  이것이 2인 가구의 주방장인 내가 냉털 경보를 발령하게 된 경위이다.






  주말이 다시 돌아왔고, 우리 부부는 베란다에 고이 쌓아 두었던 감자를 처리하기로 했다. (감자는 건랭암소에 보관하면 된다.) 단순하게 생각하자. 감자 하면 뭐가 생각나지?


  된장찌개.


  결혼 준비를 하면서 습관이 된 다이어트 식단 루틴을 아직까지도 이어오고 있는 우리 부부는 평소 찌개를 먹을 일이 거의 없었고, 그래서 우리 신혼집엔 된장이 없었다. (하지만 이건 엄마에겐 비밀이다... 들키면 된장을 장독대째 갖다 줄지도 모른다.)


  세상이 좋아져서, 찌개 양념장을 소분해서 팔더라. 딱 4인분 만들 수 있는 양념장을 사다가 된장찌개를 끓였다. 엄마가 준 양파, 감자, 호박을 꺼내어 깍둑 썰었다. 단단한 감자를 먼저 넣고 끓이다가 양파와 호박도 투하한다. 미리 사 둔 찌개용 두부와 냉동실에 굴러다니던 차돌박이는 가장 마지막에 넣어주었다. 시판용 양념은 실패하는 일이 없지, 역시 엄청나게 맛있다.



  엄마가 이사 선물로 사 준 압력밥솥에서 갓 지어 뜨끈뜨끈한 현미밥을 퍼다가 찌개와 함께 상에 올려낸다. 살짝 허전하니까 엄마가 담가 준 오이김치도 같이 올린다.


  왠지 모르게 찌개는 고단수 주부의 상징이라는 느낌이 있어서였을까- 된장찌개를 끓이고 나니까, 아기도 없으면서 (우리 부부는 딩크다) 엄마가 된 기분이 들었다.


  찌개 끓이고 남은 감자와 호박은 카레에 묻어버리면 자연스럽게 처리할 수 있다. 현미밥, 닭가슴살과 함께 차리면 일단 다이어트 식단임. 아무튼 식단임.



  감자 껍질 깐 김에 속도 내서 몇 개 더 처치해 볼까! 감자가 절반쯤 잠기게 물을 붓고 25분 정도 끓인 뒤, 젓가락이 잘 찔려 들어갈 때 바닥에 살짝 깔릴 만큼의 물만 남기고 나머지 물을 버려준다. 강불로 불을 올리고, 물기를 날리듯 감자를 굴려가며 끓이면 뽀얗게 분이 오르며 맛있는 찐 감자가 된다. 포슬포슬한 것이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다. 비록 한여름이지만, 겨울이 느껴지게 하는 감각.



  계란찜기로 왕창 쪄 낸 반숙란과 함께 사정없이 부순다. 밀폐용기에 담아서 냉장 보관하면 일주일은 거뜬한 감자 샐러드가 된다. 구운 식빵에 딸기잼 바르고 감자 샐러드만 넣어주면 맛있는 샌드위치를 만들 수 있다.







  대학 시절 자취할 때는 엄마가 가져다준 반찬의 대부분이 버려졌다. (물론 엄마는 모른다...) 가끔은 직접 차려 먹어야지, 자취방에서 직접 해 먹어야지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편의점 음식만 먹어댔던 그 시절. 내가 참 좋아하는 엄마표 오이김치가 너무 오래되어 흐물흐물해진 걸 보면서, 속상해서 반찬통을 안고 울먹였던 적이 있다.


  그래서, 사회 초년생 때는 엄마가 가져다준 반찬을 받지 않았다. 아니 받지 못했다. 어차피 다 못 먹어요, 그래도 가져가서 조금이라도 먹고 버리라는 엄마의 손길을 완강하게 저지했었다. 따지고 보면 반찬 버리는 죄책감 갖고 싶지 않아서, 내 맘 편하자고 그랬었다. 그냥 받아서 잘 먹었으면 됐는데 왜 그걸 몰랐을까.


  이제는 다르다. 삼십  중반을 바라보는   딸은 엄마가 주고  수많은 음식들을, 그리고 감자를 이렇게나 열심히 먹는다.   알도  틔울 기회를 주지 않고  먹어서 없애 버리리라. 그렇게 지난 주말에도 감자 샐러드를  만들었다. 하지만 다음에는 엄마에게  말해야지. 엄마, 지금 주려는 거에서  반만큼만 줘요,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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