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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Jeongseon Oct 01. 2023

바흐를 듣는 시간

비가 그친 오후는 눈부시다 못해 눈을 뜨고 바로 앞을 바라보는 데에도 찌푸리고 바라봐야 했다. 아직 보도블록은 젖어 있고 가로수를 덮고 있는 흙이 촉촉했다. 비가 쓸고 지나간 공기를 바람이 자꾸 불어서 더 밀어내고 있었다. 카페에 들러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물 한 병을 가져간 텀블러에 채워 자리에 앉는다. 글을 쓰기 위한 작업을 시작한다. 노트북을 켜고 커피와 물병을 손이 가기 적당한 위치에 놓고 마우스의 위치를 왼쪽으로 이동하고 안경을 쓴다. 그리고 오늘의 음악을 찾는다.


한동안 기운을 내기 위해 들었던 음악은 너무 많이 들어서 새로운 감흥을 주지 못한 지 며칠 되었다. 자극을 찾아서야 일으켜지던 몸이었나 보니 비트가 강하고 가사가 직설적인 곡들이었다. 오늘은 왜인지 카페에서 들려오는 K-팝이 주는 비트감마저 지루했다. 잠시 고민하다가 바흐를 열었다. 연주자를 검색하고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익숙한 곡이 흘러나온다. 눈을 감고 잠시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내가 웃었던가.


나에게 있어 바흐는 시작이자 마지막 정착지 같은 음악이다. 매번 시작되는 무언가, 다시 시작해야 하는 무언가에 바흐가 있었고 더 이상 내몰려 갈 곳 없는 마음에 모든 소리가 비수처럼 찌르는 것처럼 괴로울 때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최종의 소리였다. 그러므로 바흐는 음악을 틀어서 듣는 게 아니라 열어서 들어가야 하는 일종의 세계다. 문을 열듯이 바흐를 열면 심호흡한다. 마치 그곳의 냄새와 공기가 지금 내가 있는 이곳과 다른 물질인 것처럼, 그렇기에 그곳 정착민처럼 변화하는 과정인 것처럼 심호흡한다.


셀 수 없는 냇물들이 모여 강물이 되고 바다에 이르듯 갈래갈래 나눠진 물가 중 하나를 골라 발을 담근다. 풀숲에 앉아서 찰랑거리는 음악을 발가락으로 손가락으로 지나가게 둔다. 오늘은 그중에서도 마음의 병이 너무 깊어 바흐마저도 힘겨울 때 마지막으로 들을 수 있었던, 무반주 첼로 조곡의 물결에 몸을 맡긴다. 연주자는 역시나, 너무나 유명해서 새로울 것도 없지만 가장 애정했던 연주는 향긋하고 따스한 찻잔 속마음과 닮았다. 향을 마시고 맛을 음미하고 몸으로 스미는 감각이 충만하다.


급물살처럼 이어지며 힘차고 거침없이 이어지는 연주를 듣는다. 눈을 감고 그대로 머무른다. 잠시 후 눈을 뜨고 창밖 풍경에는 여전히 햇살이 눈 부시고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고 파-란 하늘엔 옅은 구름들이 드문드문 흐르다 흩어간다. 서둘러 걷는 사람들, 쉼 없이 달리는 차들, 아슬아슬 지나가는 바이크들, 도복을 입고 뛰어가는 아이들, 여전한 풍경과 쉴 새 없이 날아다니는 하루살이들이 시야를 어지럽힌다. 찰랑이는 것 같다. 모든 움직임이 움직이는 게 아니라 순간 알 수 없는 이유로 파문이 일어 찰랑거리며 일렁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눈을 감고 음악에 몰입해 있다가 바라본 세상이 새삼 낯설었기 때문이리라.






바흐의 세상에서 여러 연주자를 만나고 그들의 음악을 듣는 건 바다로 이어지는 울창한 숲을 거닐며 어루만지는 나무 둥치의 감촉, 발목을 간지럽히는 낮은 풀잎, 생각지도 못한 넓은 개양귀비 꽃밭을 발견할 때의 기쁨, 어디선가 가늘고 길게 이어지는 노랫소리, 눈이 마주치며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 흠칫 달아나는 사슴, 잠시 쉬느라 앉은 곳에서 발견한 산딸기 들처럼 내가 지금 이곳에서 결코 경험하지 못하거나 못할 사건들이다.


문을 닫고 나오면 여전히 거기선 저 모든 것들이 각자의 아름다움을 움켜쥔 채 연주하는 이들로 인해 마치 영원할 것 같은 바흐의 세상이 있어서 안도한다. 그곳은 다시 열고 들어가면 되고 그곳에 들어가는 방법이 다행히도 내겐, 복잡하거나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누군가의 연주를 공연 실황으로 들을 날도 올 것이다. 그때의 나는, 순식간에 바흐의 세상으로 몰입될 나는 얼마나 충격적일 만큼 가슴 벅찰까. 아마도 실개울이나 굽이치는 강이 아니라 거센 물결을 몰아오는 파도에 휩쓸려 버리는 강력함으로 저세상을 밀어닥칠 것이다. 거기서 마주칠 온갖 물고기 떼와 고래와 해파리와 해초들과 산호를, 그들과 스치는 순간순간마다 터질 듯한 웃음으로 기꺼이 쓸려 흘러갈 것을, 너무나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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