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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Jeongseon Oct 12. 2023

통증은 도적처럼 찾아오지 않는다

무릎을 다쳤다. 다쳤는지도 모르게 다쳤다. 다쳤다는 것을 인지한 것은 계단을 오를 때였다. 평소와 달리 찌르는 듯한 통증이 무릎 안쪽에서 시작되어 저절로 절뚝이게 됐다. 계단이 많은 층고 높은, 엘리베이터 없는 집에 살다 보니 다리를 다치면 생각 외로 괴롭다는 것을 작년 발목 인대 파열을 통해 알게 되었다. 목발을 짚고 깁스하고 무수한 계단을 오르내리며, 그리고 업무로 인한 외근 때 무던히 애쓰며 버텼던 것이 온몸에 무리를 주어 다친 발목이 낫는 데 두 달 정도 걸렸다면 뒤틀린 몸의 다른 부위들까지 괜찮은 상태로 돌아오는 데만 두 달이 걸렸던 기억이 났다.


운동을 시작한 지 세 달이 지나가고 그중 본격적으로 러닝을 한 지는 두 달 정도 돼 가는 시점이었다. 유월이 오면 감당이 되지 않는 울증이 몰려오곤 했다. 작년도 그랬고 그전 해도 그랬다. 올해라고 다를 리 없었다. 침울해지는 상태에 무너지는 마음에, 손에 대지 않던,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신경정신과 약을 투약 시 강조하는 것 중 하나가 금주인데 간에 무리가 가기 때문이다. 약 자체가 워낙에 강한 데다 알코올까지 섭취하면 해독에 무리가 가서 간이 망가진다고 절대로 술은 마시지 말라곤 했다. 그러나 시작도 끝도 없이 캄캄한 마음에 잠식되면 아무래도 상관없어진다. 흐느적거리며 울먹이며 술을 사 와 마시고 난 다음 날이면 몸은 바닥이 없이 내려앉았다.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럴 이유도, 의미도 찾지 못해서 흐느꼈다.


그날도 하루를 종일 창가에 앉아서 바깥소리를 듣고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는 상태로 머물러만 있었다. 관성처럼 나는 멈춤에 자리하고 방 안 가구 중 하나처럼 있었다. 들리는 소리는 오직 자동차, 버스, 오토바이 소리들, 간혹 사람들 소리들, 악쓰는 소리들 그런 것들이 뒤섞여 역겨운 냄새들처럼 번져 집안을 채웠다. 가구가 되었으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거슬려도 그냥 있었다. 의지로 움직이는 게 내겐 더 곤혹스러웠다. 정지의 시간을 깨어야 하는가. 정지가 나쁜가. 온갖 비타민 폭탄을 먹고 식사하고 움직여 보려 해도 삐걱거리던 며칠이 이미 지난 후였다.


커피가 마시고 싶었다. 시원한 커피, 얼음이 가득한, 아주 큰 컵에 든 커피. 바르작거리며 일어선 계기는 커피였다. 집에서 내려 먹어도 되지만 오늘따라, 당연하게도 얼음을 얼려놓지 않았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세수도 하지 않은 얼굴로 현관을 나섰다. 이어폰을 챙기고 손수건을 챙기고 휴대전화를 챙기고 이 모든 것을 담는 암백을 팔에 매고 운동화를 단단히 여미고 내려왔다. 하지만 내가 간 곳은 집 앞 커피전문점도 아니고 길 건너 편의점도 아니었다. 지난번 편의점에 들렀을 때 구입한 1+1 녹차 페트병을 손에 쥐고서 근처 학교 운동장으로 갔다.


사람들이 마치 하나의 무리라도 되는 모습으로 한 방향을 향해 걷고 있었다. 마치 쳇바퀴를 돌고 도는 구도자들 같았다. 다른 방향에선 농구 골대 아래에 학생들이 공을 튕기며 뛰고 있었다. 몸을 풀어주며 천천히 벤치로 향했다. 하늘은 구름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고 몸은 그 무게에 짓눌려 땅 아래로 박힐 것 같은 상태였다. 하지만 나는 이 움직임을 그만두면 안 되었다. 마치 중요하고 기밀한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처럼 반드시 달려야 한다는 사명감만이 무거웠다.


달리는 시간은 시작부터 부대꼈다. 제대로 먹지 않고 급하게 먹은 우유와 비타민들이 느글거렸다. 숨도 제대로 고르지 못한 채로 달렸다. 걷는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속력으로 느리게 달리는데도 나는 곧 넘어질 것 같이 휘청이며 달렸다. 보통의 날보다 더 힘겨워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멈추는 것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멈추고 싶었기 때문에, 처음으로 실패라는 글자가 워치에 뜬다 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맴돌기 때문에 더욱 달려야 했다. 지쳐서 넘어지듯 벤치에 슬라이딩하던 엔딩 순간에 그제야 안심했다. 결국 멈추지 않았다는 안도감, 종일 멈추어 가구처럼 있던 시간을 끝냈다는 안도감, 이제는 계속해서 움직일 거라는 안도감 들이, 뛰는 심장 소리 속에서 숨소리 고르게 오갔다.


근린공원으로 가는 길에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통증이 날카로웠다. 하지만 인제야 갖게 된 움직임에 대한 충동은 계속 이동을 강제했다. 푸시업을 비롯한 근력 운동을 하고 마무리로 이완 운동까지 하고 돌아와 계단을 오르는데 정말 이상했다. 통증이 베는 듯이 반복됐다. 절뚝이며 계단을 오르고 샤워하고 냉패드 붙여 붕대를 감았다. 하루 자고 나면 괜찮을 거로 생각했다. 친구가 내일부터 며칠은 절대로 러닝 하지 말라고 급하게 톡을 보냈다. 싫다고 했다. 몸을 힘들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힘들어서 견딜 수 없다고, 나는 나를 혹사해야 한다고. 이 말을 적으며 서럽게 울었다. 그럼 다른 운동으로 괴롭히면 안 되겠냐는 말에 그런 거 없다고 했다. 고집을 피웠다. 서러웠다. 마음이 힘든데 그걸 겨우 몰아내려 무섭게 애쓰고 있는데 러닝 금지라니 너무 가혹한 거 아니냐고.






계단을 내려오며 깨달았다. 아, 당분간 러닝은 금지구나. 워킹도 금지겠구나. 어제보다 더 심한 절뚝임으로 가까스로 길가에 서서, 친구너놈 의사 아니랄까 봐 안 보고도 정확하게 진단하네, 하며 칭찬 반 욕 반을 하며 길을 걸었다. 러닝도 워킹도 금지라면, 술도 금지라면, 그래 근력 운동 죽도록 해보자, 하며 트레이닝복 챙겨 입고 무릎보호대하고 오늘은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들고, 노을이 시작되는 시간을 시작으로 근린공원으로 향한다. 고통이 나를 막는다면 그게 언제나 있던 일 아니었냐며 괜히 비장하게 비장하지 않으려 웃으며, 내 친구 고통아, 같이 죽어보자,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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