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더 나쁜 것은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려는 성향은 미래의 불확실성을 회피하려는 의도에서 시작되었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미래를 통제하고자 하는 욕망으로까지 발전한다.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나쁜 상황도 거뜬하게 극복할 수 있다면, 사실 우리는 미래를 거의 장악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자신이 원하는 미래를 창조해 낼 수 있다면 완벽하게 미래를 통제하는 것이다.
이 미래를 통제하려는 욕망도 두려움만큼이나 현재를 힘들게 하는 감정이다. 욕망이라는 감정의 본질적 대상은 ‘소유’이다. 새로 나온 자동차나 새로 분양하는 아파트, 또는 회사 내에서 새로운 지위 등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유형과 무형의 대상에 대해 소유하고 싶어 하는 감정인 것이다. 이런 소유욕의 대상에는 물질 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간과 공간도 소유욕의 대상이다. 빌딩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층까지 가는데, 중간에 사람들이 타서 10층 이하의 층을 누르면 은근히 화가 난다. 엘리베이터는 계단처럼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것임에도 자신보다 뒤늦게 탄 사람들이 자신의 시간을 빼앗는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또 도로에서 차를 운전하고 갈 때, 다른 차가 딱히 무리하게 끼어들지 않은 경우임에도 은근히 화가 날 때가 있다. 이는 위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공간-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한 공간-을 상대가 빼앗아 갔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또 자신이 늦게 오는 바람에 간발의 차이로 버스를 놓친 경우도 화를 내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그것 역시 자신의 시간을 빼앗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이다.
여기서 ‘욕망(또는 욕심)’이란 본질적으로 “절대로 만족이 안 되고“, “절대로 충분하지 않으며“, “꼭 가져야“ 한다는 의식수준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욕망을 가지는 순간 그 대상은 더 멀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물질이던 아니면 시간이나 공간이던 간에 어떤 대상에 대해 소유/통제하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는 순간, 인간은 그 특정 대상과 자신 사이의 심리적 거리를 인정하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해 내가 가지고 싶거나 통제하고 싶은 그 특정 대상이 ‘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내면에서 인정하는 것이다.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쇼윈도우에 전시된 멋진 명품 핸드백을 보고 그것을 가지고 싶어 하는 욕망이 생긴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것을 가지고 싶다는 감정, 즉 욕망을 가지는 순간, 그 핸드백과 자신 사이의 거리를 인정한 것이다.
그 때부터 인간은 대상과 자신 사이에 거리를 좁히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충분한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당장 사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적은 월급을 쪼개서 조금씩 저축을 한다 던지, 아니면 돈 많은 부모에게 조른다 던지, 친구나 은행에서 돈을 꾼다 던지,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서 핸드백과의 사이에 생긴 거리를 좁히려고 행동하게 된다.
어떻든 특정 대상에 욕망이 생기면 욕망의 크기만큼 심리적 거리가 생기게 되고- 강렬하게 원할수록 더욱 먼 거리가 생긴다- 인간들은 무의식 중에 그 거리를 좁히기 위해 자신의 물리적/정신적 에너지를 쏟게 된다. 그것이 바로 어떻게든 대상을 가지려고 안달 하는 모습이다.
두려움과 마찬가지로 이 욕망 역시 어느 수준까지는 유기체로서 인간의 삶에 긍정적인 역할을 해왔다. 스스로 에너지를 만들어 내지 못하는 유기체들은 외부에서 에너지를 조달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욕망과 같은 본능적 기제를 통해서 외부의 대상을 차지하려는 행동을 일으킬 수 있었다.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에너지가 바닥이 났는데도 식욕이라는 욕망이 생기지 않았다면 많은 유기체들은 굶어서 멸종했을 것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생물적으로 생존/성장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런 욕망이라는 감정이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들은 현재 가지지 못하는 것에 대해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가질 수 있도록 스스로를 독려할 수 있다. 그로 인해 인간은 개개인의 역량과 삶의 수준 그리고 더 나아가 문명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왔다. 그러나 산업자본주의의 발달과 더불어 인간의 욕망은 적정한 수준을 넘어 지속적으로 커지고 있다. 명품 핸드백과의 거리를 좁혀 결국 핸드백을 소유하게 되면 그 다음은 신형 스포츠카와의 거리가 생긴다. ‘같은 나이 또래의 경쟁자는 이미 신형 스포츠카뿐만 아니라 한강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멋진 오피스텔도 가지고 있는 데……‘ 이런 식으로 욕망은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이 커져만 가는 것이다.
사회적으로도 많은 대중매체나 교육기관 역시 욕망을 가져야 성공할 수 있다고 프로그램시킨다. 그래서 사람들은 매사에 뭔가 목표를 정해 놓고 강렬한 욕망을 가지려고 한다. 회사에서는 윗사람들이 일에 욕심을 내라고 몰아 친다.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 공부에 욕심을 내라고 한다. ‘세상은 치열한 생존경쟁의 장이니, 욕심을 가지고 달려드는 자가 승리할 것이다.’ 우리 사회는 알게 모르게 이런 밈(meme)을 다양한 채널을 통해 개인들에게 유포한다. 이런 모습은 우리가 야망이나 성공과 관련해 으레 상상하는 이미지다. 자기희생도 마다 않고, 금욕하고, 엄청난 수고와 노력을 퍼붓고, 쉴 새 없이 죽어라 일하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덤벼들고, 엄숙한 자세로 힘들게 일하는 모습이다. 더구나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불확실성을 참지 못하는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은 나라들에 비해 이런 성향이 더욱 강하다.
이런 성향은 최악의 경우를 완벽하게 대비하고자 하는 것에서도 엿볼 수 있다. 어떤 최악의 경우가 와도 미래를 내가 원하는 대로 통제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먼저 소유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소유와 통제는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완전하게 소유된 것은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일어날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지 않은 ‘최악의 경우‘ 에 대해, 단기간에 준비하기 어려운 완벽한 대비책을 ‘소유‘ 하려는 욕망이 바로 미래에 대한 통제욕망이다. 이러한 통제욕망을 가진 사람의 현재는 확률 낮은 미래에 대해 완벽한 준비를 하느라 다 소비된다. 수 많은 현재의 삶이 올지 안 올지도 모를 미래의 삶을 위해 속절없이 희생 당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