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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레피오 May 17. 2018

1. 흐르는 삶이란,

물은 땅 위에 있다가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 하늘에서는 구름이 되어 잠시 머물다가, 때로는 여름 한철 대지를 시원하게 적시는 세찬 소나기로, 또 때로는 깊은 겨울 추억을 간직한 하얀 함박 눈이 되어 다시 땅으로 내려온다. 그런데 소나기로 내리던, 눈으로 내리던 물은 무심하게 그리고 무작위로 땅 위에 떨어진다. 그렇기에 어떤 빗방울은 문명이 닿지 않는 산꼭대기에 떨어져 맑고 투명한 냇물이 되어 흐르기도 하지만, 어떤 빗방울은 복잡한 도심의 아스팔트 위에 떨어져 지나가는 차들에게 이리저리 치이다가 결국은 컴컴하고 냄새 나는 하수구를 통해 흘러가기도 한다.  


그러나 물은 깨끗한 산속의 냇물이건, 더러운 도심의 하수구건 상관하지 않는다. 깨끗함과 더러움에 대해 중립적이다. 다만 땅 위에 떨어진 물은 그 순간부터 물줄기를 이루어 부지런히 흘러 갈 뿐이다. 물은 하나의 길을 고집하지 않는다. 더 빠른 길만을 찾아가지도 않는다. 그저 눈 앞의 기회에 유연하게 대응하다가 장애물을 만나면 뚫고 가지 않고 우회하여 간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물은 어제도 흘렀고 오늘도 흐르고 내일도 흐를 테지만, 물의 관점에서 보면 물에게는 어제나 내일도 없다. 오직 흘러가는 ‘지금/여기’만이 있을 뿐이다.  

물을 생각하면, 흐른다는 것이 너무나 당연해 보인다. 게다가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어렵게 어렵게 장애물을 헤쳐 나가는 것도 아닌지라 아주 쉬운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물이 흐른다’ 것이 그렇게 당연하거나 쉬운 것만은 아니다. 물도 ‘흐르기’ 위해서는 두 가지 결정적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물이 흐르기 위해서는 고정된 형체를 갖지 않아야 한다. 추운 겨울에 물이 얼어서 딱딱한 형체를 갖게 되면 ‘흘러’갈 수 없음을 우리는 늘 목격한다. 물이 고정된 형체를 갖춘 얼음이 되면 지면과의 마찰로 인해 멈출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어떤 경우이건 자신만의 고정된 형체를 갖춘 존재는 외부와의 마찰이 심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얼음으로 정형화되지 않은 물은 매우 유연하다. 평소에는 유유히 제 갈 길을 가다가 장애물을 만나면 부드럽게 휘돌며 유연하게 비켜나간다. 극히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물은 결코 장애물과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는다.  


둘째, 자연스런 상태에서라면 물은 언제나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그것은 중력이라는 거대한 자연의 섭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력이 있어도 그것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지 못한다면 물은 흐르지 못한다. 물이 자신을 내맡길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이유야 어떻건 중력이라는 자연의 섭리에 자신을 오롯이 내맡겨야만이 ‘흘러‘ 갈 수 있다. 그리고 중력에 스스로를 내맡기고 나면, 물은 따로 하는 일이 없다. 그야말로 자연의 섭리가 자신을 관통하여 이끄는 대로 따라 갈 뿐이다.  


산속의 냇물에서건 도심의 하수구에서건, 스스로 고정된 형체를 가지지 않고, 중력이라는 자연의 섭리에 자신을 온전히 맡길 때 비로소 물은 흐를 수 있다. 그리고 결국에는 바다로 흘러 들어 그 자체로 거대한 힘이 된다. 

한강에 나올 때 마다,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을 보고 있노라면 몇 가지 질문이 생긴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애써 하지 않는데도 끊임없이 흘러 위대한 바다의 일부가 되는 물과 같이 우리도 ‘흐르는 삶‘을 살 수 없을까?”,  “인간도 물처럼 ‘흐르는 삶‘을 살 수 있다면 삶에 있어 ‘흐른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일찍이 노자는 그런 삶의 방식을 ‘무위(無爲)‘라 설파하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삶의 방식이 무위이다. 또 손자 역시 강한 군대의 조건을 ‘물과 같다‘고 하였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강한 군대란 자연스럽게 적의 건실한 곳을 피하고 허점을 향해 진격할 수 있는 군대라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일정한 형세를 갖추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비록 물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나폴레옹도 비슷한 말을 했다. ‘나는 승리하기 위해서 단 한번도 상황을 통제하려고 한 적이 없다, 오직 상황에 맞추어 군대를 움직였다.’ 마치 물이 중력을 따라 흘러가듯 말이다.   


물에 대한 비유는 고대뿐만 아니라 시대를 초월하여 현대에도 많다. 그 중에서도 헝가리 출신의 심리학자인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물의 특성인 ‘흐른다’는 것에 착안하여 자신만의 이론을 탄생시켰다. 바로 ‘flow(몰입)’라는 이론이다. 


사람들이 운동을 하거나 일을 하다 보면 모든 것이 큰 힘들이지 않는데도 저절로 이루어지는 상태에 이를 때가 있다. 내 경험을 예로 들면 수 많은 청중 앞에서 강의를 할 때, 껄끄러운 초입을 지나고 강의가 궤도에 올라가면 마치 모든 것이 저절로 굴러가는 것처럼 강의가 자연스럽게 진행될 경우가 있다. 그럴 때는 애써 의식하지 않아도 준비했던 내용은 물론이고 평소 알고 있던 관련 지식과 정보들이 적재적소에 술술 흘러나온다. 심지어 작은 손동작이나 표정도 상황에 맞추어 저절로 일어난다. 스스로도 경이로운 이런 상태에 대해 사람들은 ‘흐르는 것 같다flow‘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 상태를 ‘flow’라고 표현 한 것이다. 사람들이 ‘흐르는 것 같다‘ 라고 묘사한 상태가 바로 무위의 상태이다. 애써 의식적으로 뭔가 하지 않지만 거대한 흐름은 제 갈 길을 가고 되어야 할 일들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음은 미국의 정신과 의사이자, 의식연구의 대가인 데이비드 호킨스박사의 명저 ‘놓아버림’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구절이다.   

‘손쉽게 성공을 거머쥐고, 원망에서 자유로워지고,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일에 감사하고, 기발한 영감을 떠올리고, 사랑을 나누고, 기쁨을 누리고, 모두가 이기는 해결책을 찾아내고, 행복을 만끽하고, 창의성을 발휘하는 

삶.'


마치 노자의 무위나 손자의 물처럼 강한 군대, 또는 칙센트미하이의 flow를 보통사람들의 삶이라는 관점에서 상세하게 정의한 듯 하다. 읽을 때마다 나의 삶도 저렇게 되었으면 하는 강렬한 소망을 느낀다. 아마도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일까? 대답은 간단하다. 앞에서 제시한 두 가지 전제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보통사람들은 자연의 섭리에 자신을 내맡기지도 못하고, 스스로 딱딱한 형체를 갖춘 존재가 되어 살아가기 때문에 그렇게 살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럴까? 도대체 우리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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