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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레피오 May 21. 2018

6. 멀리해야 할 친구들, 죄책감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부정적 감정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일까? 부정적 감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과거의 경험과 관련하여 주로 현대인의 발목을 잡는 것은 죄책감, 분노 그리고 자부심을 들 수가 있다.  


죄책감이라는 것은 자신의 실수, 어리석음 때문에 부정적 사건이 발생했다고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이다. 잘못을 저질렀으니 벌을 받아야 한다는 믿음 때문에 사건이 이미 종결된 뒤에도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힌다. 그러면서 자신이 양심이 있는 존재라는 것에 위안을 느낀다. 죄책감은 인간의 삶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죄책감이 없다면 죄를 짓고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같은 죄를 반복할 것이다. 그러다가 점점 더 큰 죄를 짓게 될 것이다. 그야말로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되는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종교에서는 죄책감을 강조한다. 남을 탓하기 보다는 자신을 탓하라는 말씀은 타당한 면이 있다.   

 

그러나 필요한 이상의 죄책감은 삶에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한다. 죄책감에서 우리가 얻어야 하는 것은 ‘교훈‘이다. 한 순간의 판단착오나 실수로 인해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그것으로 삶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착오나 실수가 부정적 결과를 초래한다 것을 깨달았다면 앞으로는 절대 그런 상황에서 그런 착오나 실수를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지금 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고 나서도 지속해서 자신을 탓하고 원망하는 것은 스스로의 발목을 잡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자의 조치를 취하지도 않고 그저 자신을 탓하기만 한다. 이럴 때는 정말 속수무책이다. 자신을 탓하는 것에서 오는 아주 저급한 쾌감을 즐기는 경우이기 때문이다. 그런 저급한 쾌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런 사람들은 영원히 자신을 탓하고 원망하는 것에 매달리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제는 타인들도 그를 원망하게 된다. 과도한 죄책감이 가져오는 폐해이다.  


정씨는 10대 아들의 자살로 인해 ‘자식을 죽인 부모‘라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매일매일을 지옥처럼 살았다. 

어느 가을 날 평소처럼 퇴근 후 집에 돌아 오니 언제나 듬직하던 10대 후반의 아들이 싸늘한 주검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아들도 말 못할 사정이 있었겠지만 아버지는 그런 사정은 아랑곳 하지 않고 그 때부터 자신을 ‘자식을 죽인 부모‘로 규정하고 스스로를 괴롭히고 처벌하면서 살아왔다. 아들이 목숨을 끊을 만큼 고통을 받고 있을 때 아버지는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아니 이상한 낌새를 몇 번 눈치 챘으나 ‘별 일 아니겠지‘하면서 애써 외면했던 기억들이 떠올랐을 것이다. 자신도 바쁘다는 이유로 ‘ 다 큰 놈이 지 인생 지가 알아서 살겠지‘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넘겼을 몇 번의 기회들이 날카로운 죄책감의 화살이 되어 아버지의 가슴에 꽂혔다.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심리적 방황을 거듭하던 그는 자살예방센터에서 운영하는 모임에 나가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그 모임은 정씨와 같은 사연이 있는 유족들의 모임이다. 같은 사연을 가진 사람들끼리 마음 터 놓고 애기를 해보니 아들의 극단적 선택이 꼭 아버지의 무관심 때문만은 아님을 알게 되어 무거운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고 한다.  정씨처럼 자신이 직접 영향을 끼치지 않았더라도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일어난 불행한 일을 자신의 잘못으로 여기고 무거운 죄책감을 지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죄책감에 ‘사로 잡히게 되면‘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지옥 같은 삶을 살게 된다.        


더 심한 것은 자신의 돌이킬 수 없는 실수로 인해 타인에게 고통 준 경우이다. 한 순간의 운전 실수로 피해자에게 회복될 수 없는 장애를 입히거나 또는 목숨을 앗아갔다면, 그에 대한 죄책감의 무게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양심은 끊임 없이 죄책감을 만들어 내고 죄책감은 스스로도 피해자와 같은 고통을 겪어야 한다고 소리친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것은 그야말로 돌이킬 수 없다. 이럴 때는 잘못에 따르는 처벌을 달게 받고, 자신이 할 수 있는 현실적인 보상을 하는 등 자신의 선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나머지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한 자신이 원망스럽겠지만 끊임 없이 자신을 괴롭힌다고 해서 결과가 ‘돌이켜 지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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