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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린이 Feb 27. 2021

정확한 거리의 역설

권여선, <이모> 후기

      

 무엇을 관찰한다는 것은 그 대상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행동이다. 어린 시절부터 우리는 관찰을 통해서 세상을 배워갔다. 관찰은 어원적으로나 본질적으로나 눈이라는 신체기관에 의존하고 있다. 눈으로 사물을 봄으로써 정보를 얻는 것, 그것이 곧 관찰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성장하면서 조금씩 그 힘을 잃어갔다. 눈으로 보는 것만을 믿었던 어린 시절을 지나면서 세상에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 나아가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우리 삶에서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랑, 우정, 죽음 등은 눈으로 관찰할 수 없지만 살면서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들이었다.

 관찰의 한계를 극복한 것은 맞지만, 역설적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의 중요성 또한 깨달았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관찰하는 법을 새롭게 배워나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다양한 형태의 사랑을 이해하고, 죽음의 여러 측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때, 관찰한다는 것은 단순히 정보를 얻는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라보는 대상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나의 ‘관찰’은 성장해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관찰’에 관한 가장 어려운 문제에 부딪혔다. “다른 사람의 삶을 관찰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는 곧 ‘다른 사람의 삶을 이해하는 방법은 무엇인가’로 이어졌다. 이와 같은 질문을 스스로 하게 되었을 때, 도저히 혼자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다. 물론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쉽게 대답해버릴 수 있었다. 그 사람과 같이 살아본다, 그 사람의 친구를 만나본다, 혹은 그 사람의 행동을 지켜본다 등 쉽고 직관적인 대답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두 적절해 보이지는 않았다. 현실적이지 않거나, 그 사람의 진짜 삶을 보지 못한다거나, 편견으로 바라보게 될 뿐이었다. 진정 삶을 관찰하는 정확한 방법은 없는 것일까? 깊은 고민에 빠져있던 때에, 권여선의 <이모>는 이에 대한 하나의 해답을 제시해주었다.

 <이모>는 주인공 ‘나’가 남편 태우의 이모, 윤경호의 삶을 바라보는 이야기이다. 혹은 윤경호가 ‘나’에게 자신의 삶을 전달하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모’ 윤경호는 왜 ‘나’에게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게 되었을까? 누구도 만나지 않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자신의 삶을, 내세울 것 없는 자신의 삶을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건 아마 주인공 ‘나’가 자신의 삶을 완전히 이해해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가족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거리가 있지만, 그렇다고 아예 익명의 사람도 아닌, 그런 관계라면 자신을 정확하게 이해해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너구나!” ‘이모’가 ‘나’를 처음 보고 누구보다 반갑게 인사했던 이유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모’와 ‘나’ 사이에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 이모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시이모이고 평생 살면서 그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던 ‘나’였다. 이모도 인생의 굴곡들을 겪은 뒤에 잠적해버렸기 때문에 둘 사이의 거리가 좁혀질 일은 없었다. 심지어 둘이 만나기 시작한 뒤로도, 그 거리는 쉽게 좁혀지기 어려웠다. 이모는 ‘나’가 간식을 사 오거나 조금이라도 무언가를 나눠주려 하면 단호하게 거절한다. 둘 사이의 거리는 그렇게 유지되었다.

 바로 이 ‘거리’가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핵심 요소였다. 누군가의 삶에 깊이 관여하게 되면 결국 그 삶을 바라볼 수 없게 된다. 자기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을 어떻게 정확하게 관찰할 수 있겠는가? 정확한 관찰에는 정확한 거리가 존재한다. 일주일 한번, 월요일 오후에 만나는 두 사람의 거리, 그것 덕분에 ‘나’는 이모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피붙이라면 완전히 공평하고 정직해지기는 어렵지.” 이모도 그 원리를 잘 알고 있었다. 아니, 그러지 않으면 그녀는 살 수가 없었다.

 이모의 삶은 관계의 연속이었다. 더 정확하게는 서로의 거리를 측정하는 관계의 연속이었다. 먼저 늙은 노숙자와의 거리 계산을 한다. 사람들이 꺼릴만한 행동을 하는 노숙자에게 돈을 주지만 동시에 두려움을 느끼며 달아난다. 가깝게 지낼 수는 없지만, 순간적으로는 가까워질 수 있는 관계였다. 다음으로 젊은 이웃 여자는 이모와 조금 더 가까워진다. 계량기가 터지면서 가까워진 둘이지만 이모는 어느새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그녀에 대해 “갑자기 여자의 어깨를 밀쳐버리고 싶은 기분이 들” 정도로 굉장히 불쾌감을 느낀다.

 여기서 이모는 인간관계의 거리에 대해 민감해진 계기를 설명해준다. 그것은 바로 스물여섯, 일곱쯤에 만났던 남자였다. 그는 이모가 맺었던 관계 중에서 가장 가까운 축에 속했다. 그러나 이모가 시외삼촌 때문에 그 사람과 헤어지게 되고, 이후 우연히 길에서 만나 그의 연인을 보게 되고, 더 나아가 그 사람이 사고로 죽게 되는 소식을 접하면서 관계는 완전히 끝이 나게 된다. 한때 가장 가깝게 지냈던 사람과의 관계가 절망적으로 끝났을 때, 이모가 할 수 있는 행동은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는 것 말고는 없었을 것이다. 관계가 깊어졌을 때 얻을 수 있는 모든 고통을 느껴버린 그녀는 가까운 관계에 대한 공포를 느낀 것이다. 

 그런데 고장 난 인터폰을 고치러 온 기사들이 그녀의 영역을 다시 한 번 침범한다. 그녀는 급기야 “인터폰을 뜯어내 바닥에 팽개치고 발로 밟아대”며 “윗집에 올라가 불을 지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존재들에 대한 나름의 응징이었다. 물론 기사들에게 직접 해를 가한다면 이모는 또 다른 삶에 엉켜 들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분풀이를 한 것이다. 그녀는 모든 것과의 정확한 거리가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절망에 빠질지도 몰랐기에, 더욱 절박하게 거리를 원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번에는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아서, 응징을 해나가며 살아온 것이다.

 그러다 그녀는 사무적인 도서관 사서로부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철저하게 거리를 유지하려는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게 된다. 이에 대해 이모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지만, 아마 자신을 되돌아보았을 것이다. 과연 나의 삶의 방식이 적절했던 것일까? 그러면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바라본 그들은 나름대로 사랑스러운 데가 있는 이웃들”이라고까지 마음을 고쳐먹는다.

 그렇게 자신을 돌아보던 이모는 문득 “지독한 통증”을 느끼며 대학교 1학년 때를 떠올리게 된다. 알 수 없는 충동으로 남자의 손바닥을 담뱃불로 지졌던 그때를 떠올리며, 괴로워한다. 그토록 거리를 유지하려던 그녀가 갑자기 그때를 상기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분명 그때도 지금처럼 침입자를 응징한 것일 뿐인데 왜 그때가 불현듯 떠오르는 것일까. 이번 생처럼 느껴지지 않는, 마치 전생처럼 느껴진다는 그때가 마지막 순간에 생각난 것은 왜일까.

 나는 <이모>를 통해서 분명 삶을 관찰하는 방법을 배웠다. 정확한 거리에 의한 정확한 관찰. 이모와 ‘나’ 사이의 거리, 이모와 다른 사람들 사이의 거리, 그것이 그 사람의 인생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이 방법을 통해서 바라본 ‘이모’의 삶은 완전히 다른 것을 보여주었다. 분명 정확한 방법으로 측정했는데, 결과는 그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모는 삶의 마지막에 유언처럼 말한다. “나도 애초에, 이렇게 생겨먹지는, 않았겠지. 불가촉천민처럼, 아무에게도, 가닿지 못하게.” 그녀의 방법은 후회될만한 것이었다. 삶의 태도로서는 정확하지 못했다. “그게 뭘까... 나를 살게 한…. 그 고약한 게…….” 그녀가 마지막에 물었던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녀가 가장 잘 알았을 것이다. 담뱃불로 지지던 그때가 마지막에 떠올랐던 것도, 그것을 떠올릴 때 고통을 느꼈던 것도, 결국 후회 가득한 자신의 모습이었다. 이제 정확하게 거리 계산을 하며 살 수 있게 되었는데, 이제 인간관계에서 고통 받지 않으며 살 수 있게 되었는데, 이모는 슬퍼한다.

 정확한 거리의 역설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거리를 얻고 난 뒤에는 고통도 없지만, 행복도 없다. 인간관계는 양면적인 것이다. 고통을 피하는 것은 곧 행복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며, 반대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곧 고통을 초래하는 것이다. 이모는 고통을 피하고자 행복을 포기했다. 그리고, 후회했다. 그때 그 남자의 손을 잡았더라면, 담뱃불로 지지지 않았더라면, 작은 행복이라도 느꼈을 텐데. 거리를 유지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텐데. 그리고 마침내 인간관계가 행복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텐데. 늦어버린 깨달음을 얻은 그녀는 그렇게 눈을 감는다.

 나는 <이모>를 통해서 다른 사람의 삶을 이해하려면 일정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정확한 거리에 대해 조금 알게 된 것 같다. 그러나 새로운 질문에 봉착한다. 인간관계에서의 정확한 균형은 무엇인가. 아마 평생 풀지 못할 숙제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모’의 삶을 통해서, 적어도 인간관계에서 행복의 가능성을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행복을 위해서 정확한 거리 유지가 핵심적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거리를 좁혀가면서, 동시에 관계의 고통을 느끼면서, 행복을 찾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자신과 상대방을 지킬 수 있는 균형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이모>를 통해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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