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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린이 Mar 30. 2021

이것이 인간인가

나카시마 테츠야,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후기

   

 나는 인간성에 관심이 많다. 구체적으로는 인간성을 위협하는 것들에 관심이 많다. 가령, 운명, 우연, 시간 등과 같이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것들에 흥미를 느낀다. 이러한 위협을 극복하는 순간 비로소 인간성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극복하는 힘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다. 그 힘은 모성애, 우정, 헌신 등과 같이 긍정적인 감정뿐만 아니라 복수, 탐욕, 충동과 같이 부정적인 감정에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인간성을 탐구하기 위한 도구로써 영화를 본다. 인간성에 대한 좋은 영화를 볼 때면 가슴이 뭉클해지고 인간성이라는 것은 위대한 것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그들과 달랐다. 분명 휴머니티를 보여주는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인간성이라는 것은 현실 불가능한 것처럼 그려졌다. 내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영화였다. 인간성, 휴머니즘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현실에 존재할 수 있는가?

 마츠코의 삶을 보면 극도로 인간적이었다. ‘인간적이다’라는 표현은 모순적이다. 가장 인간적인 것은 가장 신적이며, 동시에 가장 동물적이다. 헌신적이라는 점에서 신적이지만, 결과적으로 파멸해간다는 점에서 동물적이다. 마츠코가 새로운 남자를 만날 때마다 그녀는 신에 가까워지는 동시에 동물에 가까워진다. 이 역설적인 상황을 보면서 우리는 가슴 아픈 동시에 경건함을 느낀다. 이때 나는, 인간성이라는 것을 점점 알 수 없게 된다. 과연 인간성은 신의 영역인가? 아니면 동물로 돌아가는 것인가? 그동안 인간성에 대해 안일하게 생각했던 나에게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이라는 영화는, 극단적 인간성을 보여줌으로써 휴머니즘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다.

 인간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여기서 간단하게 대답하기 어렵다. 그것은 평생 고민해도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일 것이다. 다만, 마츠코의 일생을 보면서 적어도 인간성은 가변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녀가 보여준 성실함과 헌신은 다른 환경이었다면 조금 더 긍정적인 결과를 냈을지도 모른다. 수학여행에서 류가 자신의 잘못을 말했으면 이렇게 파멸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마지막에 중학생들이 죽이지만 않았어도 그녀는 다시 행복한 삶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성은 상황의존적인 것이다. 그녀의 삶은 주변 상황에 따라 완전히 변화하였다. 그녀의 행동 역시 카멜레온처럼 상황에 맞춰지고 있었다. 여기서 슬픈 것은 그녀가 너무나 성실했다는 점이다. 성실한 나머지 부정적인 상황에서의 행동마저 성실했던 것이다. 결국 그녀는 인간성을 보여준 것이지만 결과는 그리 긍정적이지 못했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보면서 우리 세상에는 사실 인간성이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말했듯이, 인간성은 신적이면서 동물적인데, 우리 주변에는 완전한 신도 없고 완전한 동물도 없기 때문이다. 마츠코가 극도의 인간성을 보여줬다고 평가할만한 이유는 바로 불행히 죽었다는 사실 덕분이다. 최고의 인간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죽음이 필요하다. 이 또한 얼마나 우스운 역설인가. 죽은 사람에게서만 인간성을 찾을 수 있다면, 우리 현실에는 그것이 없는 것과 다름없다. 인간성은 허상인 것일까. 살아있는 사람은 신이 될 수도, 동물이 될 수도 없다. 그렇다면 현실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일까.

 그러나 다소 극단적인 사고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인간성이라는 것은 신 혹은 동물이라는 이분법의 논리에 맞지 않는다. 그 속에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할 것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긍정적일 때도 있고 부정적일 때도 있다. 이처럼 가변적이면서도, 운명이나 우연 등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 인간성의 가장 큰 특징인 것이다. 마츠코는 이러한 기준에 따르면 매우 인간적이다. 그녀의 삶은 누가 봐도 파괴적이고 불운하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모자란 사람들이고 마츠코를 이용하는 사람들뿐이다. 그녀가 어떤 행동을 해도 파국으로 한발 나아가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츠코는 자신의 최선을 다했다. 비록 이 ‘최선 다함’ 때문에 더욱 불행해지긴 했지만 그녀는 이러한 우연이나 운명 따위에 굴복하지 않았다. 마지막에 메구미의 명함을 생각하고 희망을 가졌던 마츠코를 보면 그녀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야속하게도 마지막까지 예상하지 못한 불운에 의해 죽게 되지만, 감독은 그녀가 가장 인간적인 삶을 살았다고 말한다. 마츠코는 마지막에 동요를 부르며 아버지와, 만났던 남자들과, 자신의 삶과, 모든 불운과, 그리고 운명과 화해한다.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에 있던 컴플렉스였던 여동생 쿠미와도 화해한다. “타다이마.” “오카에리.” 두 사람의 화해 혹은 자신의 깊은 내면과의 화해는 이렇게 이뤄졌다. 이로써 그녀는 최고의 인간성을 획득하게 된다.

 인간성은 무엇인가?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보고 난 뒤에는 더욱 대답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에서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인간성을 위협하는 요소들을 극복하는 과정 그 자체, 그것이 바로 인간성의 일부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마츠코는 인간적이고, 또 인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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