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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hloura Jan 30. 2023

버티는 노오-력이 꼭 필요할까?

버티는 삶에 대하여

본점에서 사령장을 받은 입사 첫날, “이제 우리 인생 60살까지 정해졌네.” 라며 동기의 뿌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오랜 취업 준비를 끝으로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는 경사스러운 날, 그 말을 듣고서 오히려 등골이 서늘해졌다. 분명 내가 제일 오고 싶었던 곳이고 좋은 사람들이 모인 곳인데 왜 뜨악했는지 나조차도 의아해서 그 장면이 특히나 생생하다. 그러고 보면 나의 퇴사는 이미 그때부터 정해졌던 건지도 모르겠다.  

    

직장에서 버티는 삶을 살고 있을 때 뚜렷하게 기억나는 일이 하나 더 있다. 인터넷 어디에선가 ‘당신에게 일의 의미는 무엇인지’ 묻는 글이 있었는데 거기에 내가 남긴 댓글은 ‘나에게 일은 시련이자 고통이며 이를 극복하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나와는 정반대 되는 의견인데, 그때는 일과 직장을 구분하지 못했을뿐더러 인생은 원래 고난의 연속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저 버티고 단단해져서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평생에 걸친 미션이라고 생각했다.     


‘일이란 원래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힘들고 고된 것이다.’ ‘직장 일도 못 버티면서 이 험한 바깥세상은 무슨 힘으로 어떻게 살아갈 거냐.’ ‘이 세상에 자기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사는 사람은 없다.’ ‘일과 삶을 분리해서 그곳에서 행복을 찾으면 된다.’라는 게 당시 직장 동기, 상사들 대부분의 논리였는데 그곳에서 오래 지내며 나도 모르게 동조하면서 비슷한 생각으로 지내왔나 보다.      


한때는 운명이라 생각했던 직장이었고 사명감 넘치게 일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연차가 쌓일수록 시간 때우기 혹은 그날의 업무를 쳐내기 바쁜 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내가 하는 일에서 의미를 찾기가 어려웠으며, 이게 과연 맞는지에 대한 양심의 가책까지 느꼈다. 시간이 지날수록 버티면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찾기가 어려웠다.      


참고 견디는 시간을 보낸 사람은 결국 어떤 식으로든 보상을 받을 것이라 믿는 것이 언뜻 보기엔 꽤 희망적인 이야기로 들린다. 하지만 결국 난 버티지 못했고 그곳에서 도망쳐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티는 게임에서 중도 포기를 해버린 내가 그래도 지금까지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딱 두 가지다.     

하나는, 언젠가 올 그 ‘좋은 날’이 내게는 더 이상 좋지 않았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마지막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버텨봤기 때문이다.      


본점에서 조금만 더 일하면 승진과 동시에 지점장 자리를 준다 했었다. 지금 생각해도 파격적인 제안이었는데 그 소리를 듣자 오히려 빨리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더 커졌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들 하지만, 그 낙은 내가 바라는 것이어야 했다. 승진보다는 오히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업무를 경험해 본 후에야 떳떳하게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후련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회사 생활 마지막 1년째에 나도 모르게 ‘1년 더 다닐 시간에 카페 아르바이트를 했으면 훨씬 좋았겠다.’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나서야 길고 긴 회사 생활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승진, 명예보다 카페 아르바이생 자리를 부러워하다니, 평안 감사도 제 싫으면 그만인 법이다.      


퇴사 이후 거의 처음으로 그 당시 썼던 일기를 들춰보았다. 할 수 있다. 버틸 수 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 마지막 1년 간의 기록은 처절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애쓰고, 발버둥 치고 있었다. 내가 나를 설득하기 위해 끝없는 자기 암시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버텨온 것에는  마시멜로우 실험에 대한 설명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리 사회에 자리잡은 인고에 대한 잘못된 믿음이 한몫했던 것이 틀림없다. 인내는 필요하다. 하지만 나는 그 해석을 잘못했다. 목적도 방향도 없는 인내는 자기 학대에 불과하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래도 이 시기가 있어 다행인 것은 마지막까지 조금만 더, 조금만 더를 외치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버텨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그 어떤 미련이나 후회도 없다.      


취미도 인간관계도 어느 하나 꾸준히 못하는 내가 유일하게 오랜 시간을 들였던 게 직장이었다. 그런데 그 회사조차 버티지 못하고 결국 ‘포기’해버렸으니, 후회가 없다 해도 마음이 불편한 건 여전했다. 패배자처럼 비치진 않을까 염려되었다. 그런데 정말 기막힌 우연처럼, 그 시기에 만난 책 속의 문장이 단숨에 나를 자책의 구렁텅이에서 완전히 건져 올려주었다.     


「하지만 여기서 확실하게 밝혀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의미를 발견하는 데 시련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는 단지 시련 속에서도 ─ 그 시련이 피할 수 없는 시련일 경우 ─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만약 그 시련이 피할 수 있는 것이라면 시련의 원인, 그것이 심리적인 것이든 신체적인 것이든 정치적인 것이든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인간이 취해야 할 의미 있는 행동이다. 불필요하게 고통을 감수하는 것은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라 자기 학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에 나오는 구절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딱 하나다. 사회가 말하는 메시지는 ‘견디는 것’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견디는 것의 목적과 방향을 분명히 안다면 불필요한 턱걸이 대결에서 애꿎은 노오-력을 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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