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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수 Aug 06. 2018

0. 인문학의 눈으로 세상을 보자

인간을 인간답게 해 주는 것

어렸을 때, 그러니까 초등학교 저학년 때 친구들이랑 나누었던 이야기 중 이런 것이 있다.

"이런 어려운 수학은 도대체 왜 배우는 거야? 나중에 먹고 살 때 어디다 써먹으려고?"

물론 그때야 한창 놀고 싶은 마음뿐 책상에 앉아 뭔가에 제대로 집중하려는 동기가 없었다. 자연히 공부를 싫어하게 되었고, 그래서 저 말이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앞으로 내가 펼칠 삶이 먹고살기만 하면 되는 삶이라면, 지금 이렇게 구슬땀을 흘려가며 수학 문제집이나 어려운 책을 읽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닌가?


그때부터 십수 년이 지난 지금, 나는 의과대학 학생이 되었다. 그것도 졸업을 목전에 둔, 곧 있으면 병원에 인턴으로(혹은 공중보건의사로, 군의관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렇게 머리가 굵어진 지금, 나는 저 말을 반박할 수 있게 되었다. 과연 나는 먹고살기만 하면 만족하는가? 아니, 그렇지 않다. 먹고사는 것 그 너머에 분명 무언가가 있다. 그 무언가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우리 주변, 우리를 스쳐 지나간 모든 역사적 사건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다. 그 '무언가'를 쫓지 않고 나의 시간을 오롯하게 나의 기계적인 유지에 쏟는다면 나의 시간이 너무나도 아깝다. 그 '무언가'는 인문학이다. 

 


갑자기 웬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하실 분들도 있겠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인문학을 비롯한 기초학문이 경시되고 있는 실정에서는 인문학이 무엇인지, 어떤 효과를 갖는지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물론 나도 인문학의 위력은 몸소 체험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인문학은 공부한 만큼 그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아직 20대이고, 인문학 공부랍시고 집 주위 도서관에서 책들을 찾아본 지 1년 조금 넘은 나로서는 당연히 인류 역사가 쌓아 온 인문학의 두께와 위력을 실감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사적으로 인문학에 매달리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 나를 비롯한 사회를 바라보는 눈과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철학의 대상을 세계에서 인간으로 돌린 이후부터 인문학, 철학의 효과는 자명해졌다. 그것들은 '먹고살기만 하는 삶보다 더 나은 삶을' 영위하려는 인간에게 무한한 시각과 힘을 제공한다. 가령 우리는 에마뉘엘 레비나스로부터 타자를 존중해야 하는 이유, 더 나아가 타자 사이에서 현현하는 무한자(그의 입을 빌어 말하자면, 신)를 알 수 있고, 메를로-퐁티로부터 타자와 소통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레비나스와 메를로-퐁티의 철학을 접한 사람은 타자를 존중하고, 타자와의 소통이 어떻게 가능한지 깨닫는다. 먹고 살기만에 만족하는 사람들과는 다른 점이다. 인문학적 성찰 없이 단지 자기 자신에 집중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레비나스와 메를로-퐁티의 철학을 접한 사람들은 타자와의 적극적인 관계를 수립할 수 있고, 그것이 왜 중요한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예를 들어 볼까. 스피노자의 '에티카'에 대한 해설서 중 감명 깊게 읽었던 것은 강신주의 <감정 수업>이다. 여기서 저자 강신주는 에티카에서 표현한 인간의 50개 가까운 감정들을 제시하고 풀이한다. 감정은 모든 행동의 원동력이 될 수 있는 바,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다스리며 표현할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나쁜 의미로 인간은 감정의 철저한 노예가 된다. 감정에 자아가 휘둘리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철학자들이 말한 그들의 철학을 알면 우리는 좀 더 나은 삶이 가능해진다.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직시할 수 있고, 내부의 자폐성을 깨고 타자와 세계와의 적극적인 관계를 수립하면서 사회에 녹아들어 갈 수 있다. 기계적으로 먹고 자는 삶보다는 훨씬 나은 삶이 아닌가.


인문학의 가장 높은 진입장벽은 바로 인문학(철학)이 갖는 선입견이다. 사실 선입견도 아닌 것이, 도서관에 가서 철학자의 원전 또는 유명한 해설서를 집어 들면 한 페이지의 거의 대부분이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문학은 어렵다'는 인식이 우리 머릿속에 뿌리 깊게 박혀 있다.

하지만 인문학은 사람과 세계에 대해 성찰하고 연구한 그 모든 흔적이다. 인문학에는 현실 세계의 모든 학문, 즉 경제학, 철학, 의학, 공학 등 모든 것이 포함된다. 자연스럽게 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대부분의 흔적이 인문학의 관심이자 대상이 된다. 시계를 보고 시간의 일방 통행적 특성(시간은 왜 거꾸로 가지 않을까?)을 생각해도 그것이 인문학적 사유고, 사랑하는 사람을 보며 사랑은 무엇이고 어떻게 하면 보존할 수 있을까 고뇌하는 것도 인문학적 사유다. 개미가 기어가는 것을 보고 인간 사회를 떠올리는 것도 인문학이며 철학이다. 그래서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인문학적인 생각을 할 수 있고, 또한 하고 있다. 위에 언급한 레비나스, 스피노자, 메를로-퐁티부터 시작해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토마스 아퀴나스 등 고대~중세 철학자나 근대를 주름잡았던 베이컨, 데카르트, 칸트, 헤겔, 키르케고르 등 역사에 굵직한 이름을 남긴 '선택받은 자'만의 학문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옆집 김개똥, 앞집 이말숙, 뒷집의 박순자,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모두 인문학자며 철학자다. 


이제 내가 브런치에 올리기 시작할 이야기는 바로 그 인문학의 이야기다. 정확히 말하자면 철학자들의 이야기다. 그런데 철학만을 그대로 소개한다면 독자도, 나도 지칠뿐더러, 철학을 소개하는 책들이나 글들은 이미 나보다 훨씬 사유가 깊은 사람들이 이미 많이 내어놓았다. 그래서 나는 영화를 제시하면서, 그 영화와 일맥상통하는 철학을 소개할 것이다. 최대한 쉽게, 최대한 일상생활에 쓰이는 용어로써, 최대한 접하기 쉬운 영화를 사용하면서 말이다. 부디 많은 사람들이 이 글을 읽었으면 좋겠다. 한 사람의 생각은 그 자체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소통하며 다른 사람과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이 글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인문학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추는 역할을 한다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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