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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수 Aug 06. 2018

1. 이별의 아침에 약속의 꽃을 장식하자 - A

레비나스의 타자 철학을 중심으로. "타자는 무한자다"

철학을 곁들인 영화 리뷰, 그 첫 번째는 <이별의 아침에 약속의 꽃을 장식하자(이하 이별아침)>이다. 왜 갑자기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냐고? 아직 나의 내공이 부족하여 실사영화를 분석하는 건 많이 어렵더라. 그래서 일단 접근성도 쉽고, 좀 더 익숙한(익숙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으로 시작하고, 이후에 실사 영화를 리뷰해 볼 생각이다. 


영화관에서 이 영화를 보며 시종일관 턱을 괴고 눈썹을 찌푸리면서 있었다. 나는 영화를 보기 전에 항상 기대를 하나씩 하는 편이다. 이 영화에게는 "이별을 따라오는 필연적인 아픔을 극복하는 방법"을 기대했었는데 이야기가 흘러갈수록 익숙한 감성적 전개만 보이고, 내가 정작 기대했던 이별의 극복 방안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종 평에는 "익숙한 신파전개"라면서 별로 높은 평점을 주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난 직후에, 그림(작화)이 각본에 비해 너무나 뛰어나다, 반대로 말하면 작화 실력이 아깝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하지만 뭔가 걸렸다. 이 영화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리라는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 모성애, 사랑에 관한 영화는 차고 넘치는데, 왜 하필 감독은 이런 진부한 전개 방법을 택했을까? 혹시 모성애와 사랑 이외의 시각에서 이 영화를 보면 무언가 보일까?


혹시 영화를 안 본 사람이나, 영화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인터넷을 찾아보거나 영화를 다시 한번 보길 바란다. 지금부터는 영화 내용을 모두 안다는 가정 하에 이야기를 풀어 보겠다.

영화는 크게 세 집단으로 분류할 수 있다. 레일리아-마키아(와 에리얼-디타, 편의상 레일리아-마키아라고 하겠다), 크림과 장로를 포함한 다른 대부분의 요르프 족, 그리고 메자테다. 간단하게 요르프와 메자테, 두 집단으로 분류하지 않는 이유는 요르프 내부의 레일리아-마키아와 다른 요르프 족들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리투아니아 출신 유대인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말을 빌리자면, 레일리아-마키아를 제외한 요르프와 메자테는 '초월을 겪지 못했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초월'이 무엇이고, 왜 레일리아와 마키아가 '초월'을 이루었다는 것일까?

위 사진에 나온 사람이 에마뉘엘 레비나스다. 레비나스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레비나스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 필요가 있다. 아주아주 간단하게 알아보자. 리투아니아에서 유대교 부모 밑에서 자란 레비나스는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혀 강제수용소 생활을 했으며, 레비나스의 가족들은 아우슈비츠에서 모두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그 뒤로 레비나스는 눈을 감을 때까지 독일 땅을 밟지 않았다.

레비나스 철학의 시작은 "어떻게 그 이성적이라는 인간이 윤리적 책임을 상실한 채 전체주의라는 이념을 세계에 적용할 수 있었는가, 타자를 어떻게 나에게 복속시키는 것이 가능했었는가?"라는 물음으로부터 시작한다. 그가 보기에 2차 대전, 그리고 수많은 근대 이후의 갈등들은 인간이 타자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타자를 나와 다른 것으로 보지 않고 내 기준에 맞춰 타자를 동일하게 환원시키기 때문에 일어난다.

근대를 열었던 철학자들 중 이성을 강조했던 사람은? 힌트. 그의 명언 중에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이 있다. 바로 르네 데카르트다. 데카르트의 생각의 주체(코기토)는 모든 것을 의심한 끝에 단 한 가지 확실한 것, 의심하는 사유의 주체인 나의 존재는 확실하다고 결론 내렸다. 바로 여기서부터 서구 철학 내 이성의 위치는 다른 모든 것 위에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 이성적인 인간이 세계 규모의 전쟁을 두 번이나 내고,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또 현재 진행형으로 수많은 갈등을 일으키는 까닭은 바로 그 이성이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이성은 자기 스스로 존재하고, 타자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레비나스는 그런 타자의 특징, 나의 코기토가 알 수 없고 나로 환원될 수 없는 타자의 고유한 특성을 '타자성'이라고 한다. 레비나스가 보기에, 타자성을 포함하지 않는 이성의 반성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끔찍한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가령, 서구의 근대화라는 명목 하에 식민지를 착취하고 토착민의 기존 문화를 파괴하는 모습은 토착민의 타자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레비나스는 코기토가 자기 내부로 가라앉는 것을 멈추고(즉 타자성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똑바로 마주 보면서 그들을 인정하면서, 타자에 대해 내가 갖는 윤리적인 책임을 다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초월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초월이란, 단순히 예전의 나보다 더 나은 나로 진화하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고, 신이나 절대자, 무한자를 만나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레비나스가 타자에 대한 강조를 멈추지 않기 때문에, 레비나스의 철학은 타자 철학이라고도 불린다.



글로만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철학이다. 특히 레비나스의 타자 철학은 우리에게 익숙한 자아 중심, 코기토 중심의 철학이 아니라 탈코기토의 철학이라 더더욱 이해하기 힘들다. 이제부터는 <이별 아침>과 함께 레비나스의 철학을 짚어 보자. 크게 세 가지 화두로서 레비나스의 철학을 접할 것이다.

첫째. 우선 레비나스의 시선으로 메자테와 요르프의 모습, <이별 아침>의 서사를 쭉 훑어보자. 레일리아-마키아, 다른 요르프 족들, 그리고 메자테를 서로 비교해 볼 것이다.

둘째. 내가 제일 궁금해했던, 타자와의 이별에 동반되는 필연적인 슬픔을 어떻게 극복하였는지, 감독의 대답은 무엇인지 알아보자.

마지막으로, 영화 초반에 장로의 말과는 달리 마키아가 여행을 계속하며 또 다른 만남, 또 다른 이별을 계속하는 이유, 즉 소통과 연대, 타자와의 만남이 필요한 이유를 알아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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