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의 시선으로 본 요르프와 메자테
이 영화는 신기하게도 레비나스의 철학과 잘 들어맞는다. 전 글에도 언급했듯이 타자성을 인정하고 윤리적 책임을 다해야만 우리는 주체를 초월할 수 있고, 그런 사회가 당연히 건강한 사회일 것이다. <이별 아침>에서는 초월을 이룬 사람으로서 마키아와 레일리아를, 그렇지 못한 사람들로서 메자테와 다른 요르프 족들을 내세운다.
메자테는 어떤 국가인가? 마치 비 서구권 문명의 국가들을 전근대적이고 비논리적이라는 이유로 침략하고 그들의 평가를 가치 절하하는 식민지 시대 정복자들처럼, 영화 초반의 메자테도 요르프를 국력 강화의 수단으로만 보고 그들의 타자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메자테는 메자테의 기준과 가치관을 타자에게 그대로 적용하며, 요르프의 '환원 불가능한 고유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또, 레일리아의 딸 메드멜이 요르프의 핏줄을 이어받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레일리아를 유폐시키고 메드멜을 격리시키는 등 비인간적인 모습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메자테 국왕에게서는 이런 비인간성이 광기 어린 모습과 합쳐져 관객에게 일종의 불쾌감까지 들게 한다.
어떤 면에서는 메자테는 자폐다. 자폐는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타인을 직시하지 않는 특성이다. 메자테 국민들과 국왕이 자폐증 환자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타인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 자신의 가치관을 끝까지 고집하다가 결국 침략을 받아 자멸한다는 이야기이다. 마치 소멸해가는 블랙홀처럼. 이 와중에 메자테의 지도부는 외국의 침략에 맞서 필사적으로 싸우는 군사들과 위험에 빠진 국민들을 내버리고 도주함으로써 끝까지 타자성과 윤리적 책임을 저버린 모습을 보인다. 자기중심주의에 빠진 현대인이나 타자성을 인정하지 않는, 근대의 반성하지 않는 이성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다른 요르프 족들은 어떨까? 그들도 메자테와는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여전히 자폐적이다. 장로의 "밖에 나가게 되면, ...... 정말로 혼자가 되어버릴 거야."라는 말에서부터 알 수 있다. 불로장생인 탓에 인간을 사랑하면 반드시 상처 입게 된다. 그 때문에 요르프는 그들 스스로를 유폐시키고 요르프는 인간과 거의 교류를 하지 않으며, 그들 내부만의 사회를 만든다. 그 때문일까? 요르프에서도 메자테처럼 타자성을 인정하지 않는 인물이 나온다. 바로 레일리아를 사랑하는 크림이다. 마키아는 요르프를 떠나면서 인간과 어울리기 위해 요르프의 특징인 금발을 주황색 머리카락으로 염색하게 된다. 그리고 에리얼을 키우는 내내 그 주황색 머리카락으로 생활한다. 다시 말해 마키아의 주황색 머리카락은 인간 사회와 같이 생활한 증거이자, 에리얼을 키운 시간이다. 마치 요르프가 짠 히비오르가 요르프의 일상과 역사 그 자체를 의미하듯이. 크림은 마키아의 그 주황색 머리카락을 잘라낸다. 요르프 족에게는 요르프 이외의 시간은 필요 없다면서 말이다. 또, 이야기 후반부에 메자테가 적국의 침략을 받을 때 크림이 탈출을 요구하지만 레일리아가 메드멜을 걱정하면서 탈출에 주저하자 동반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크림은 자신의 생각을 레일리아나 마키아가 일방적으로 이해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좌절되자 마키아의 머리카락을 잘라버리고, 레일리아의 목숨을 끊으려 한다. 아주 위험한 자폐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크림과 메자테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내향성 내지 자폐성을 띠는 자아는 타자를 보지 않는다. 이는 자기 자신에게 전념하는 이기적 삶이자 다른 대상을 먹고 다른 대상을 소유하면서 변화시키는, 나로부터 시작하는 일방적인 삶이다. 이때 발생하는, 일상적인 삶을 넘어서 존재하는 숭고한 가치가 결핍된 삶을 현대인의 결핍이라 한다(결핍과 치유-관계성에 대한 성찰, 김경준). 일어나서 멍하니 아침을 먹고 어딘가에 부유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삶-그러나 이 삶은 슬픔을 달래고 죽음을 극복하기에 충분치 않다. 왜냐하면 그런 삶으로는 나의 질적 도약을 도모할 수 없고 단지 내가 나를 먹이는 삶이 쳇바퀴처럼 반복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쳇바퀴를 박차고 나가서, 즉 나의 유지를 위해서 먹고 마시는 삶을 떠나서 나의 바깥이나 나와는 다른 자로 초월해야 한다. 이때, 레비나스는 내재성으로서의 주체성(크림과 메자테)은 세계를 소유하고 지배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무한히 확장하려는 욕망, 즉 전체성에 대한 욕망을 보이는데, 이런 의미로서의 주체성은 본질적으로 이기주의적이면서 자기 자신의 삶에만 관심을 갖기 때문에 초월이 불가능하다고 밝히고 있다(강영안, 레비나스의 철학 해설). 레비나스에게 초월, 즉 자기 자신이 좀 더 나아지는 삶 / 나아가 살아가면서 절대자나 무한자, 신을 만나는 경험은 타자성을 인정하고 타인에게 나아가며 윤리적 책임을 다할 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는 초월을 통해 '슬픔을 달래고 죽음을 극복'한 등장인물로 마키아(와 레일리아)를 소개하고 있다.
레비나스의 철학은 타자의 철학이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타자성을 인정하고, 타자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다함으로써 내재성으로 가득 찬 일상적 삶, 즉 기존의 나를 초월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마키아의 행보를 통해 과연 마키아가 레비나스의 '초월'을 겪었는지 생각해 보자. 세 가지 측면으로 마키아를 분석해 볼 수 있겠다.
1. 타자의 타자성을 인정하였는가?
2. 타자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다하는 모습이 묘사되었는가?
3. 기존의 연약하고 수동적으로 묘사되는 모습을 탈피했는가? 1, 2에 의해 초월을 겪었다고 볼 수 있는가?
메자테가 끌고 온 레나토(작중 전설상의 고룡이다)에 의해 마키아는 요르프의 주거 지역 바깥으로 던져진다. 숲을 헤매고, 절망감에 절벽에서 몸을 던지려 할 때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게 되고, 결국 유목민족의 텐트에서 강도에게 살해당한 부모와 이제는 고아가 된 갓난아기를 발견한다.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인간과 요르프의 혼혈인 상인은 아이를 거두어 키우려는 마키아를 말린다. 그는 아이는 장난감이 아니고, 제대로 키우면서 책임을 지는 부모 노릇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때 마키아의 행동과 대사를 기억하는가?
마키아는 사후 경직으로 굳어진 부모의 손을 꺾어가면서까지 고아, 에리얼을 꺼낸다. 이어지는 대사는 "장난감이 아니에요." 상인의 말을 단순히 긍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나는 이 대사가 영화의 주제의식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동시에 레비나스의 '초월'의 기본적인 조건을 만족했다고 본다. 마키아는 이 상황에서 처음으로 타자성을 깨닫기 때문이다. '장난감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에서 충분히 알 수 있지 않은가? 장난감은 아이의 손에서, 아이의 의지대로 움직인다. 오직 아이의 기쁨을 위해서 쓰이다가 아이가 성장하고 버려지는 존재다. 타인을 이런 식으로 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타자의 고유한 특성은 쳐다보지 않고, 오직 나만을 위해서 타자를 재구성하고, 그런 '재구성한 타자'의 이미지를 실제 타자에 덮어 씌운다. 그럼으로써 그 타자는 상처받고 만다. 그런 사람은 타자를 (어떤 의미에서는) 장난감으로 보는 것이다. 마키아는 그런 장난감의 이미지를 단호하게 거부한다.
어쩌면 태생적인 차이, 불로장생의 요르프와 잠깐을 사는 인간의 차이를 이미 인지하고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안은 이 아이는 눈 깜짝할 사이에 어른이 되고, 나보다 먼저 죽으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에리얼은 나와 '다르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요르프보다 빨리 죽음'이라는 특징이 레비나스가 말한 '주체(나, 즉 마키아)'로 환원될 수 없는 타자의 고유한 특성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마키아는 에리얼을 장난감이 아니라 타자로 인지, 타자성을 인정하였다. 이것은 대단한 것이다. '타자는 나와 다르다, 타자는 나로 환원될 수 없는 고유성이 있다'라는 그 단순한 사실을 무시하여 우리는 두 번의 대참사를 겪었고, 작중의 메자테도 결국 자멸의 길을 걷는다. 그런 단순하고도 치명적인 사실을 이미 열다섯 살의 힘없는 마키아는 깨달았다. 그리고 이런 타자성은 영화의 말미에 두 번이나 아주 슬픈 감정을 묻히고 관객에게 찾아온다. (내 곁이 아니라) '에리얼이 있어야 할 곳으로 데려다 달라는' 마키아의 말, 그리고 수십 년 후 에리얼의 임종을 지켜보는 마키아. 두 번의 이별은 결국 마키아와는 다르고, 마키아와는 함께 할 수 없는 에리얼의 타자성을 극단적으로 부각하여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숨 막히게 아름다운 풍경과, 세상에 오직 에리얼과 마키아밖에 부각되지 않는 그 아름다운 순간이, 반대로 그 둘의 이별의 공간이 되어 더욱 슬프다.
레비나스에게 초월이란 단순히 자아의 질적 향상으로 볼 수도 있지만, 더 나아가 절대자(내지는 신)가 있는 곳으로 나아감을 뜻한다. 그리고 그 절대자나 신은 나를 둘러싼 타자다. 신은 어떤 사람인가?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행하면서 절대적 선의 대표자인 전지전능 전선의 존재이기도 하며, 내가 어찌할 수 없는 힘으로 나를 복종시킨다(내가 원해서 복종한다). 레비나스는 이런 '주체가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주체를 복종시키는' 신이 바로 타자라고 말한다.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레비나스의 말에 따르면 타자는 가난한 자, 이방인, 과부와 고아의 얼굴을 하며, 그런 타자의 얼굴이 보여주는 윤리적인 요구는 우리를 따르게 만드는 무한한 힘을 지닌다. 그리고 그 윤리적인 요구를 따를 때 초월이 가능하다. 주위를 둘러보라. 당장 한 끼 해결할 돈이 없어 굶는 사람들,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과부, 부모를 모두 잃어버린 고아의 얼굴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그들을 도와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필요성이라기보다 차라리 명령이다. 그들은 비참한 처지에 있지만, 그들을 보는 우리는 크나큰 힘에 이끌려 동정심을 갖고,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려고 노력하며, 그들을 돕게 된다. 가난한 자, 이방인, 과부와 고아는 일견 비참하지만 우리에게 윤리적인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명령은 마치 신의 계시처럼, 절대권력을 지닌 왕의 목소리처럼 우리에게 다가와 감히 그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못하게 한다.
레비나스는 이 점을 들어 타자는 무한자이며 신이라고 말한 것이다. 신은 교회나 성당에서 말하는 것처럼 고귀하고 전지전능한 추상적 존재가 아니라, 우리에게 명령을 내리는 고통과 비탄에 찬 얼굴들 가운데 현현한다. 그래서 그런 '윤리적 명령'을 인지하고 따를 때, 우리는 신, 무한자, 우리 너머에 있는 크나큰 힘과 마주한다.
마키아는 윤리적 명령에 충실히 따랐다고 말할 수 있다. 에리얼은 그녀에게 있어 이방인이자 고아이다. 그 고통스러운 얼굴을 마주하자, 마키아는 남들이 다가가기도 꺼려하는 시체에 다가가 사후강직을 꺾고 아이를 꺼낸다. 에리얼을 먹여 살리기 위해 히비오르를 짜 팔고, 생전 처음 여관에서 허드렛일을 하기도 하며, 마키아의 어머니됨을 부정하면서 매몰차게 떠나는 에리엘을 마지막까지 배웅하고 걱정한다. 영화 러닝타임의 대부분이 마키아의 희생이다. 그 숭고해 보이기까지 하는 희생은 오직 에리얼을 위해서 집중되어 있다. 어떻게 마키아더러 타인의 윤리적 명령을 거슬렀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래서 마키아는 초월을 겪었는가? 영화 내에서 초월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단연 (포스테에도 나온) 마키아가 군인이 된 에리얼을 내려다보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이후에 용의 등에 타 멀리 날아가는 장면이다. 왜냐하면 그 장면이 바로 감독, 오카다 마리 식으로 묘사된 '초월'이기 때문이다.
마키아는 동틀 무렵 외적의 침략에 맞서 싸운 메자테의 군사이자 자신의 아들, 에리얼을 간호한다. 그러면서 정신이 든 에리얼에게 담담하게 에리얼, 그리고 마키아의 여정을 읊는다. 그 과정은 초월의 조건, 마키아가 처음으로 타자성을 인정하고, 에리얼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다한 내용이다. 그 내용을 들으며 관객은 마키아가 걸은 초월로 향한 길을 되짚어 보게 한다. 이윽고 마키아는 에리얼을 떠나보내고, 레나토(고룡)의 등에 타 메자테로부터 떠나간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우리의, 인류의 시선을 초월한 곳이다. 이 과정 내내, 감독 오카다 마리는 말 그대로 숨 막히는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마키아는 타자와 어울리며 타자성을 알았고, 윤리적 책임을 다했다. 그 결과, 마치 고대 설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아름다움에 휩싸여 떠나가고, 우리의 시선을 초월한다. 이때 마키아는 이전의 마키아가 아니다. 그녀는 이전의 수동적이고 우유부단하면서 혼자됨을 두려워하는 자폐적 존재에서 숭고하고 용감함을 깨달은 존재로 변했다. 그녀는 요르프 족 내부에서 살 때의 자기 모습을 초월했다.
감독은 은근히 우리에게 마키아와 비슷한 삶을 살도록 종용한다. 대놓고 이런 가치관을 대사로서 나타내지는 않지만 수많은 묘사가 이를 뒷받침한다. 그런 경향성이 가장 확연히 드러난 것은 메자테의 몰락이다. 전에도 썼듯이, 내향성에 치중하고 타자성을 끝까지 외면한 메자테의 수뇌부나 크림은 몰락한 반면 마키아(와 레일리아)는 초월을 겪고 숭고한 성녀의 이미지로 나타난다(영화 후반부의 마키아의 모습을 생각해 보라). 이 외에도, 타자성을 깨닫기 전의 마키아가 숲 속에서 자살하려 한 점, 메자테의 하잘것없는 퍼레이드 등에서 감독은 타자를 마주하고 윤리적인 메시지에 응답할 것을 종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레일리아는 어떤가. 마키아와 레일리아는 서로 닮았으면서도 굉장히 대비되는 인생을 겪게 된다. 영화를 보면서 느낀 둘의 가장 큰 차이점은 마키아는 피가 섞이지 않은 아이, 에리얼과 영화의 거의 내내 동행하지만 레일리아는 피가 섞인 아이, 메드멜을 낳고도 평생 메드멜과 1분 이상 같이 있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둘은 불로 장생하는 요르프 족이며, 영화 말미에 레일리아 역시 마키아와 같이 초월의 여정을 떠난다. 그렇다면 마키아처럼, 레일리아는 초월을 겪은 것인가? 겪지 못한 것인가?
특이하게도 레비나스는 출산을 타자성을 깨닫는 계기, 초월의 계기 중 하나로 본다. 내 아이는 나의 염색체의 절반을 물려받고, 어머니와는 태반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자식은 부모의 분신이나, 동시에 부모는 자식을 소유하거나 조종할 수 없다. 부모가 아무리 A를 원한다고 해도 자식은 B를 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의 가능성과 나의 미래는 내 아이의 미래와 원칙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부모는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성'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내 아이는 말 그대로 '내(우리)가 낳은 아이'이자 나의 분신 격인 존재다. 자연스럽게, 내가 나를 증오하지 않는 이상 나의 분신(즉 또 다른 '나')의 미래를 위해 부모가 무엇인가 챙겨 주어야 할 의무를 느낀다. 즉, 타자인 내 아이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모는 초월을 겪는데, 부모가 누릴 수 없었던 지나간 과거의 시간을 나의 분신이 다시 겪게 되기 때문이다. 두 가지의 미래를 경험하는, 인간은 할 수 없는 일을 해냄으로써 부모는 초월을 겪는다.
레일리 아는 출산을 겪었다. 그렇기 때문에 레비나스의 견해에 따르자면 레일리아는 초월을 겪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탈출을 위한 절호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메드멜을 걱정하여 탈출을 거절하며 극의 말미에 아주 잠깐 메드멜을 만나고 마키아와 떠나갈 때, 나(레일리아)는 잊고 너(메드멜)의 인생을 살으라는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을 한다. 레일리아는 자신과 메드멜의 차이를 이해하고 있고, 메드멜의 미래를 진심으로 신경 쓰고 걱정하고 있다. 마키아가 고통스러운 얼굴을 마주함으로써 초월을 겪었다면, 레일리아는 출산을 통해 초월을 겪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