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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수 Jun 08. 2019

1. 이별의 아침에 약속의 꽃을 장식하자 - C

'초월'이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이유

앞서 말했듯이 마키아와 레일리아는 초월을 경험하였다. 초월이란 쉽게 말해 자신의 극복이다. 예전의 나약하면서 수동적인 울보 마키아에서, 타자의 타자성을 깨닫고 윤리적 책임을 다하는 숭고한 성녀 이미지의 마키아로 탈바꿈한 것을 생각해 보자.

여기서 근본적인 질문을 하나 던져 보자. 왜 초월이 필요한가? 자신을 극복하는 것이 좋은 것은 맞다. 왜 좋을까? 개별화되고 고도로 분업화된 현대 사회에서, 굳이 타인을 마주보아야만 이룰 수 있는 초월은 여전히 유효한 덕목인가?


초월이 어려운 이유는 타자의 타자성을 깨닫는 것이 선결 과제이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자에 대한 윤리적인 책임을 다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타자성이란 나로 환원 불가능한 타자의 성질이다. 고슴도치처럼, 우리는 서로를 향해 다가가지만 타자성 때문에 어느 지점 이상 가까이 가지 못한다. 때로는 가시에 찔리는 것이 너무 아프고 두려워, 만남이 가져오는 이별이 두려워 타인에게 나아가지 못하기도 한다. 나 바깥에 있는 것들에 대한 연결고리를 하나하나 끊는 것이다. 이윽고 그는 그가 경험해 온 세계에서 분리되어 떨어져 나온다. <결핍과 치유-관계성에 대한 성찰, 김경호>에 따르면, 이것은 단순히 그가 아는 사람들, 익숙한 풍경에서의 유리에 그치지 않고 실존다운 실존을 영위하기 위한 형이상학적, 도덕적인 자원에서 분리됨을 의미한다. 한 마디로 물리적인/정신적인 공동체와의 작별이다.

이 때의 그는 비록 좋은 집과 맛있는 식사, 모두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배우자와 재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무언가 결핍되어 있는 상태에 빠진다. 이런 사회는 <결핍과 치유>에서 밝힌 '결핍사회'다. 결핍 사회란 물질적 향락을 누림에도 불구하고, 타자성에 굴복하여 타자와 나 이외의 세계와의 연결성을 끊어내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결핍감을 느끼는 사회를 말한다. 이런 사회에선 더 이상 내일을 기약하기는 힘들다. 시간이 갈수록 나에게 해를 끼치는 결핍감은 커지기 때문이다. 내일은 오늘보다 힘든 날이 되는 것이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사회의 구성원들은 차라리 내일의 가치보다는 오늘의 '단말마적인 일시적 쾌락'을 추구하며, 더 잔인하게 말하자면 시간을 초월한 보편적 가치보다는 인간을 이루는 가장 밑바닥의 쾌락만 추구하게 된다. 더 왜소하고 더 초라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나는 이 사회에, 이 공간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도대체 왜 존재하고, 나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이 상황을 실존적 위기라고 보아도 괜찮겠다.


결핍된 사회에서는 결핍된 개인이 있다. 결핍의 원인은 타자성에 굴복한 것이다. 그렇다면 결핍의 원인을 제거한다면, 다시 말해 압도적인 타자성에  굴복하지 말고 끊임없이 타자와 연대하려고 노력한다면 어떨까? 앞의 고슴도치의 예를 다시 생각해 보자. 고슴도치는 서로의 체온으로 서로를 덥혀 주기 위해 가시에 찔리면서 적당한 두 개체 사이의 거리를 찾는다. 개인도 그렇다. 타자성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세상에서 가장 사이가 좋은 연인이라도 남자가 여자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타자성을 인정하면서 끊임없이 서로를 이해하는 노력을 하는 것은 가능하다. 연인끼리나 부부 간에는 서로 싸울 수 있지만 그 뒤 머리를 식히고 서로 솔직하게 어떤 점에 화가 났는지 이야기하는 것에 해당하겠다.

요지는, 결핍된 개인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이 반드시 연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 구성원 간에는 타자성이라는 가시가 있어 섣불리 다가가면 찔리는 것은 맞지만, 그 아픔 때문에 멈추지 말고 구성원 간에 불편함이 없이 연대할 수 있는 거리를 모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마른 모래처럼 산산이 흩어져 자폐성의 함정에 빠지고, 결핍된 개인이 생겨나게 된다. 결핍된 개인이 흔한 사회는 결국 내일이 없는 사회이다.


이 영화는 결국 이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타인을 향해 나아가지 않거나, 이해하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는 (그러나 물질적으로는 부족함이 없는) 요르프와 메자테가 쇠락해 가는 모습을 통해 결핍된 개인과 결핍 사회를 보여 주고, 반대로 생활고에 시달리지만 타자성을 인지하고, 타인을 향해 나아가 초월을 이룬 마키아를 보여 주면서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역설한다.

결핍 사회에 대한 강한 비판이 지금 특히 의미를 지니고 영화화된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이 결핍 사회의 전조기이기 때문이다. 굳이 어려운 책이나 논문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알 수 있다. 동의하기 힘든 사람들도 있겠지만, 우리나라의 경제적 수준은 분명히 향상했다. 최근 들어 경제적인 지표가 향상되었는가는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길게 놓고 보았을 때 경제적 수준은 향상했다. 하지만 그에 맞춰 우리는 연대하고 있는가? 경제적인 원인이든 아니든 연대하지 못하는 1인 가구는 증가하고 있고, 사회적인 약자에 대한 논의는 끊이지 않으며, 뉴스를 조금만 보다 보면 구성원 간의 갈등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물질적인 풍요와 사회적 연대가 발맞추어 성장하지 못하는 결핍 사회는 점점 다가오고 있다.

초월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그저 메자테의 왕처럼 '단말마적인 현재의 쾌락'만을 추구하는 단순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시대를 초월한 가치를 추구하고, 결핍 사회가 다가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타자성의 이해를 바탕으로 한 타자와의 연대, 다시 말해 초월이 필요하다.



초월에 이르는 길은 분명 순탄치 않다. 길고 날카로운 타자성의 가시에 한두 번쯤은 찔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렇게라도 타자와 연대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핍 사회에 한 발 다가서게 된다. 어찌 보면 처절한 우리의 현실을 역설적이게도 아름다운 형태로 나타낸 것이 <이별의 아침에 약속의 꽃을 장식하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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